시인과 시의 거리감에 관하여
시에 관한 짧은 생각.
시인은 각자 저마다의 감각과 환영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조리개를 가지고 있다. 눈과 손, 혀와 같은 육체의 감각. 그리고 기억을 받아들이고 다시 떠올리는 영혼의 감각은 시의 심도를 조정한다. 시에서의 심도란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언어로 인식하는 범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시 언어에서 심도가 발생되는 과정은 이러할 것이다. 시인이 한 대상을 향하여 초점을 맞출 때, 그 대상의 앞뒤로 초점이 맞는 영역이 형성되어 그 영역에 있는 여타의 대상들도 모두 초점이 맞는 상태가 되며, 그 영역을 벗어난 대상들은 모두 탈 초점 상태가 된다. 시인의 초점이 맞는 영역의 범위만큼 시의 심도를 생기게 한다. 대상에 초점이 맞는 범위가 넓을 때, 심도는 깊어지고 그 범위가 좁을 때는 심도가 얕아진다.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심도가 깊을수록, 시를 구성하는 언어 거의 전 부분에 걸쳐,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초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심도가 얕은 시보다 구체적이고 세세한 장면과 언어를 시에 담을 수 있다. 언어의 심도가 깊을수록, 시의 화상은 또렷해지고 확장된다.
시인은 내면의 조리개를 이리 저리 돌려가며 고유한 초점을 맞춰본다. 조리개 장치를 이루는 영 점대의 작은 소수점의 숫자를 만지고, 조리개를 통과한 빛의 양을 확인한다. 같은 조리개 값이라도 언어의 피사체와 그 배경의 거리감에 따라 시의 심도는 변화하기 때문에, 자신의 조리개를 계속 확인해야 한다. 대자연에 의해 내팽겨 쳐진 사물과 현상들은 시인의 조리개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고 속성이 재해석된다.
많은 시들이 공통적인 대상과 현상을 다루더라도, 시는 항상 색다르게 해석되고 읽혀진다. 시를 읽은 독자의 감상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이 존재하여도, 개인의 감상은 고유하고 다채로운 특징을 지닌다. 시를 포착하는 시인의 초점이 다양하듯, 시 독자의 초점도 그 만큼 혹은 그 보다 다양하다.
시인은 피사체를 잡기 위하여 조리개를 조절함과 동시에, 자신의 시의 피사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시에서 어 떠한 목소리 없이 현상과 대상만이 드러나 있어도, 그 속에는 항상 시인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시인이 현실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면 시 세계에 살고 있는 시인도 버둥버둥 움직여댄다. 시는 시인이 포착한 피사체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시 세계가 시인을 피사체로 포착하며 시 안으로 잡아 끌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금세 실증을 느낀 시인이 시에서 손을 떼어도 말이다.
시인이 불려놓은 미지한 세계에 내팽겨 쳐진 언어들은 그 자리에만 놓여있지 않는다. 누구의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시인의 주변을 맴돈다. 시인의 주변에는 시인이 뱉어낸 언어가 거리감을 두고 돌아다니고 있다.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소리 내어 가까이 읽을 때, 시의 화상은 한계 없이 선명해지며 심도는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