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양의 미래」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알 수 없는 것들”
- 황정은, 「양의 미래」
붙잡지 않는 것들
간암 투쟁을 하는 어머니와 간병하는 아버지가 있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일을 하며 거친 세상과 마주한다. 그에게 현실은 납작하고 밋밋한 케이크처럼 생긴 상가 건물의 공간과 같다. ‘나’는 손님에게 뺨을 맞기도 하며,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뜀박질을 한다. 더군다나 폐결핵까지 걸리며, 일상의 비극성은 더욱 확대된다.
‘나’는 이 시대의 흔한 인물상이지만, 이 존재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자신의 외부 세계를 초연하게 바라보는 고유의 결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신의 어려움을 강조하거나 감정에 시달리는 면모를 보이지 않는다. 특정 상황에 대한 ‘나’의 감정이 녹아있는 문장을 자주 마주할 수 있지만, 마치 그렇게 되어버릴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건조하고 단정적인 시선이 소설을 압도하고 있다.
상실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나’의 슬픔은 살며시 드러났다가 처음부터 업었던 것처럼 금세 증발하고야 만다. 연인 호재가 자신을 떠났을 때, 다른 누구와 다시 연애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나’의 예감은 음지와 양지를 오가는 햇빛의 움직임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는 나의 목소리에서는 절망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와의 일화나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되새기는 것 보다는, 병원 측의 실랑이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나’가 부정적인 상황을 발화할 때 유지하는 일정한 거리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슬픔보다 자유가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삶의 압박 속에서 참혹을 옆에 끼고 일상을 버텨왔던 화자 나름의 태도가 그를 더욱 더 억세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고 가난하다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아무도 없고 가난한 채로 죽어’ 라며 조지 오웰의 문장 옆에 써놓은 ‘나’의 끄적거림에서는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품어 왔던 그녀의 절규가 한 문장으로 증폭되어 다가온다.
여전한 방식으로
아파트의 단지를 관통하는 서점 지하 터널은 진주 실종사건의 목격자가 된 ‘나’의 불편한 상황을 관통하는 공간이다. 햇살이 드는 유리창 너머와 상반되는 이미지의 지하 터널은 침침한 화자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소설에서 지하 공간은 ‘나’가 밥을 먹는 일상성이 보여 지기도, ‘나’의 악몽을 일으키는 곳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가 터널에서 느껴지는 암흑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터널이 자신을 마주하도록 하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가 벽을 등지고 앉는 것보다 벽을 마주보고 있는 행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것에서 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진주가 실종되자, ‘나’는 지하터널을 의심한다. 아무것도 없다는 상가 관리인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듯, 그녀는 공구를 뒤져 망치를 찾아낸다. 그리고 벽과 마주한다. ‘나’는 망치를 휘둘러 벽 너머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터널이 있을 것이란 생각과 터널이 없을 것이란 생각은 ‘나’를 두려운 감정에 처하기에 충분했다. 계란 껍질을 까듯, 뚫어낸 터널의 내막은 검은 공동 혹은 진물 같은 곰팡이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공동과 곰팡이는 ‘나’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망치로 벽을 뚫어 이것과 마주한다는 것은 ‘나’가 스스로를 직시하는 것과 동일한 양상을 띤다. 그녀는 결국 망치를 내려놓고 벽을 뚫는 것을 그만둔다. 그녀에게는 스스로의 무게를 견뎌낼 만한 힘도, 더군다나 그것을 이겨 내야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의 일상은 전의 삶과 다르지 않다. ‘나’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에 여전히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가 사는 동네엔 아카시아가 많이 퍼져있다. 아카시아 나무는 서점의 유리 너머 마주했던 벚나무와 상충하는 존재로 보인다. 거리에 벚꽃이 날아오를 시기에 진주가 실종된 것처럼, 아카시아 냄새가 맴도는 이 동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함을 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