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백장 쉰
미술치료사로 일한 첫 해에 만난 아이들 중에 ‘재영’이라는 친구가 있다. 중학교에 올라가는 시점에 만나서 고등학교 졸업 직전까지 수업을 했다. 지적장애가 있지만 사회성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덩치는 크지만 애교가 많고, 늘 잘 웃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이전에 잘 알지 못했던 E성향 사람들의 면모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한때는 진학을 포기했지만 막판에 자신도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적극적으로 그 선택을 지지해 주었다. 결국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 졸업했고, 실습과 자격증 과정까지 잘 마치고 취직도 했다. 지금은 병원에서 이송업무를 맡아 성실히 일하고 있다.
재영이의 가장 큰 힘은 가족이다. 부모님은 물론 형과 친척들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사이가 무척 좋고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아주 가끔 연락이 오다가 재작년부터는 전화를 자주 하기 시작했는데, 한 번 전화를 받으면 40~50분은 기본이다. 병원 일이 힘들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주로 쏟아낸다. “선생님…” 하고 축 처진 목소리로 전화할 때가 많다. 나 역시 지친 날에는 전화를 피하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쉽게 상처를 받는 친구다.
오늘도 한 달 만에 전화가 왔다. 재영이는 판다 ‘푸바오’를 너무 좋아해서 휴가를 내고 중국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잘 보고 왔어?” 하고 묻자, “진짜 너무 좋았어요!”라며 들려오는 목소리가 전과는 사뭇 달랐다. 힘이 넘치고 신나 있었다. 5박 6일 동안 오픈런으로 가장 먼저 입장해서 문 닫는 5시까지 내내 푸바오만 지켜봤다고 한다. 처음엔 ‘중국까지 첫 해외여행을 가서 그럴 수 있나’ 싶었지만 그 활기가 넘치는 목소리를 듣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런 여행도 괜찮겠다. 좋아하는 것만 온전히 보고, 그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경험도 꽤 의미 있겠구나’ 하고.
몇 달 전, 친한 언니와 임윤찬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 언니 덕분에 어렵게 구한 티켓이었다. 언니는 며칠사이 이미 다른 공연을 두 번 더 다녀왔고, 심지어 일본 도쿄 공연까지 2회나 예매해 두었다고 했다. “처음 콩쿠르 무대에서 임윤찬을 보고 팬이 됐는데, 영상이나 음반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던 게 실제 공연을 보니까 이제야 해소되는 기분이야.” 언니의 말이었다. 나 역시 공연을 직접 보니 깊이 몰입하게 되고 큰 감동을 받았다.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말 좋았지만, 다시 어렵게 표를 구하려 애쓰며 많은 것을 투자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재영이나 언니를 떠올리면서 생각해본다. 나도 언젠가 한 번쯤은 어딘가에 푹 빠져서 도파민이 폭발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떤 장면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르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언젠가 나의 결핍을 채워줄 그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순간에 "유레카!"를 외쳐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