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이다.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길 한쪽에 조그마한 공원 주차장이 있는데 처음 보는 차가 주차돼 있었다. 자동차 회사에 다니다 보니 차를 유심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실루엣은 분명히 소나타인데 휠(타이어 안쪽 바퀴 구조물)은 소나타의 것이 아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자세히 들여다보니 벤츠의 브랜드가 새겨진 휠이었다. 네 바퀴 모두 그랬다. 소나타에 휠만 벤츠라니, 두 회사의 만남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트렁크에 붙어있는 SONATA 영문자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몇 년 전에는 소나타 같은 아우디를 목격했다. 소나타의 범퍼에 현대 마크를 떼어내고 아우디 마크가 붙어 있었다. 순간 아우디의 신차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소나타라는 것을 눈치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주는 왜 차량을 개조했을까?
소나타를 타고 있지만 벤츠나 아우디처럼 보이기 바란 것일까, 아니면 마음만이라도 외제차를 타고 있다고 느끼고 싶었을까. 곰곰이 생각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기 차인데 뭔들 못 할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구나'라는 편리한 방법으로 수긍했다. 나도 학창 시절 하얀 운동화에 나이키 상표를 칠했다.
자동차의 휠, 휠 디자인이 자동차의 전체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
벤츠의 신발을 신은 소나타를 보며 내가 쓴 책들을 떠올렸다. 책을 쓰면서 내가 아닌 척을 한 적은 없나 싶어서다.
나는 항상 솔직하게 표현하고,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적었을까. 장점을 과장하고 결점을 감추진 않았을까. 다른 작가의 사상이 마치 내 지식인 양 쓰지 않았는지 되짚어봤다.
유시민 작가는 《표현의 기술》에서 글을 읽으면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쓰면서 자꾸 글을 가다듬었다. 모난 부분은 깎고, 둥근 부분은 광이 나게 문질렀다. 글을 퇴고하는 과정에서 내 개성이 동시에 깎여나간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초고가 가장 나답지 않을까. 퇴고를 거듭할수록 글에서 나라는 사람의 색깔이 흐려지지 않았을까. 유시민 작가는 과연 내 초고와 탈고한 원고를 비교하며 같은 사람이 쓴 글이라고 생각할까?
글쓰기는 참 어렵다.
나는 솔직하게 글을 썼는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썼는가?
단점과 치부를 자신 있게 드러냈는가?
분명 아니다.
책을 쓸 때마다 여러 각도로 글을 바라보며 자기 검열을 했다. 독자가 좋아하는 것, 듣고 싶어 하는 것을 고려하며 글을 썼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100% 솔직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할 수 없었다. 책이 한 권이라도 더 팔리기를 바랐다. 책이라는 상품이 전쟁을 치르는 출판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남이 듣고 싶은 말을 써야 한다고 합리화했다. 나는 벤츠의 휠을 장착한 소나타가 아니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내가 쓰고 싶은 글과 독자가 읽고 싶은 글의 접점을 찾는 것은 꽤 중요한 책 쓰기의 포인트다. 일기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쓰면 글쓰기는 즐겁겠지만 독자는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자가 듣고 싶은 말만 적으면 글에서 나라는 존재가 점점 희미해진다.
그렇기에 내 스토리를 글에 담는 게 최선이다. 독자가 듣고 싶은 말을 내 경험에 녹여서 써야 한다. 내 스토리와 경험이 담긴 글에는 나라는 존재가 희석되지 않는다. 중심을 잡고 글을 쓰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솔직한 글
덤벙거리지 않는 글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
세 가지 모두 만족하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쓰기를 거듭하면 언젠가 세 가지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황금비를 찾을 수 있을까. 어제오늘은 유난히 글쓰기에 관한 고민이 많다.
글을 쓰며 재미를 느끼고, 읽는 이도 만족하는 글을 쓰고 싶다. 어떻게 내 생각을 솔직하고도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잡념이 많아진다. 어제는 잘 썼다고 생각했던 글이 오늘은 이상해 보인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으니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겠지'라며 생각의 꼬리를 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