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글을 썼다. 8시 30분에 잠에서 깬 딸이 안방에서 뛰쳐나온다. 번개맨이 보고 싶다고 보챈다. 못 이기는 척 TV를 켜주고 30분 더 글을 썼다.
아내도 일어나고, 아침으로 프렌치토스트를 먹었다. 설거지를 한 뒤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았다. 10분 정도 쉬었다가 밀린 집안일을 했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옷을 개켰다. 딸도 함께 수건을 개키고 싶나 보다. 도와주려는 마음은 기특하지만 여섯 살이라 아직 서툴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손이 더 가게 만든다. 시간도 많겠다, 마음껏 놀아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두었다.
건조대가 비어서 유아용 세탁기를 돌렸다. 아내는 책을 읽었고, 나는 옷을 마저 정리했다. 딸은 개켜진 수건으로 탑을 쌓고 활짝 웃고 있었다. 아내와 나도 환하게 웃었다.
세탁기는 '우웅, 우웅' 소리를 냈다.
거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 평온한 아내와 딸의 모습에 세탁기 소리가 더해졌다. 행복했다. 세탁기 소리가 일상의 행복을 상징하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의 힘은 놀랍다. 소리는 음악이 되어 마음을 치유하기도 하고 소음이 되어 마음을 병들게도 한다. 어렸을 때 세탁기 소리는 제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소음에 가까웠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니 평범한 일상의 소리가 좋다.
학창 시절 아침, 압력밥솥이 끓는 소리는 단잠을 깨우는 자명종 시계였다. 이불을 덮고 싶지만 일어나야 한다는 신호였다. 지금은 다르다. 압력밥솥 끓는 소음은 고소한 밥을 기다리게 하는 소리가 되었다.
소음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같은 소리를 들어도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자동차 마니아에게 엔진의 굉음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소리이지만,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몰입을 방해하는 소음이다.
건설 회사 CEO에게 아파트 준공하는 소리는 오케스트라지만, 옆 동네 주민에게는 공해에 가까운 소음이다.
나이, 성별, 직업, 관심사에 따라 같은 소리도 기분 좋게 들릴 수도 있고 몸서리치게 듣기 힘든 소음이 된다.
나는 왜 세탁기 소리에 안락함을 느끼고 압력밥솥 끓는 소리에 군침을 흘렸을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이 다려주는 옷을 입고, 차려주는 밥을 먹었다. 이젠 내가 직접 챙겨야 한다. 스스로 하는 일이니 싫지 않고 좋다.
20대 초반, 기차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는 소음이었다. 아기가 울면 '부모는 뭐하냐'라고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부모가 들으라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30대 초반, 돌이 지난 딸을 안고 기차를 탔다. 아기가 울 때마다 식은땀이 났다. 객실을 빠져나와 아기를 달랬다. 나도 힘들지만 딸이 훨씬 힘겨워 보였다. 이제 기차에서 아기 우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 부모와 아기가 괜찮을지 마음이 쓰인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와글거리는 소리도 정겹게 들린다. 시끄러운 소음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소리가 되었다.
소리만이 아니다. 오감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달라졌다. 생선과 나물은 질색이었는데 어느새 생선과 나물 이름을 외운다. 청국장 냄새가 그렇게 역했는데 이제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초등학생은 초딩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로 보인다. 이렇게 한 살, 한 살 먹나 싶다.
딸이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면 같은 소리를 나와 다르게 느낄까 봐 걱정이 된다. 나는 소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딸은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학창 시절 인기 가수의 랩을 따라 부르면 어머니가 그게 무슨 노래냐며 김수희의 '애모'가 최고라고 한 것처럼.
미래의 딸이 듣는 소리를 저도 같은 소리로 듣고 싶다. 새로운 세대의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기꺼이 그러고 싶습니다. 어른의 깊은 눈동자와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모두 갖추고 싶다.
오늘도 열린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