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미셸 투르니에의 만남, 그리고 질 들뢰
〈아무도 모른다>는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하여 2004년에 개봉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의 네 번째 영화로 1988년 도쿄 도 도시마 구에서 일어난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1989년에 각본을 쓰기 시작했지만 뜻하지 않게 발생한 일들로 인해 실제로 영화 제작은 2002년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네 아이를 무책임하게 방치하여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만큼 영화는 세상을 향해 훈계의 메시지를 내는 사회고발 영화에 머물고 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은 아이들의 일상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들의 목소리를 세심하게 들음으로써 관객들에게 우리가 사는 상대적 가치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섬세하고 독보적인 연출과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연기하도록 이끌어 자신의 철학을 〈아무도 모른다〉에 담아냈다.
〈아무도 모른다〉의 스토리를 살펴보던 도중 머릿속에 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1967년에 펴낸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이 소설은 영국의 대니얼 디포가 1719년에 발표하여 고전이 된 『로빈슨 크루소』를 투르니에가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세상에 나온 이후 여러 작가가 각자의 로빈슨 이야기를 펴냈는데 대부분 디포 소설의 아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그 한계를 벗어나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아무도 모른다>는 시대적 상황이나 이야기 소재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상이하다. 그럼에도 도심 속의 섬에 갇힌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무도 모른다〉와 태평양 한가운데 무인도에 표착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내러티브에는 묘하게 닮아있는 점들이 있다. 아파트와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 그 속에서 어려운 조건에 얽매여 온 힘을 다하는 아키라와 로빈슨, 이들을 자유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사키와 방드르디라는 존재까지. 이에 본 에세이에서는 두 소설 속에 타나난 유사점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덧붙여 본 강좌 “들뢰즈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대화: 마주침과 사유의 이미지”의 취지를 살려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서 바라본 〈아무도 모른다〉를 고찰하고자 한다.
∎ 203호와 스페란차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키라, 교코, 시게루, 유키 네 아이가 엄마 후쿠시마 게이코와 함께 이사 온 아파트의 호수가 203호이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장난꾸러기 시게루가 소란을 피워 어쩔 수 없이 이사를 오게 되었다. 집주인 내외가 아이들로 인한 소음을 싫어해서 엄마는 딸린 식구는 장남인 아키라뿐이라고 둘러댄다. 이사를 마친 엄마는 ‘큰소리를 내지 말고, 203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하고 아이들에게 지킬 것을 다짐받는다. 아키라만이 생필품을 사러 밖으로 나갈 수 있고 교코에게는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까지만 허용된다. 심상치 않은 방식으로 집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203호는 대도시 속의 섬에 갇힌 꼴이다. 외출을 할 수 있는 아키라라고 해서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함께 놀 친구라고는 하나 없고 물건을 사러 들르는 편의점 직원이 아는 사람의 전부이다. 이사 온 아파트에서 아이들은 희망찬 생활을 시작했지만 엄마가 집을 나가고 생활비가 떨어지자 삶의 의욕을 잃는다. 가스에 이어 전기와 수도마저 끊기고 마구 어질러지고 악취가 진동하는 203호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로 변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곳에서 민들레 씨앗을 받아다 키우며 삶의 희망을 이어간다. 203호는 엄마를 대신해서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로빈슨이 승선한 버지니아호는 1759년 9월 30일에 칠레 서쪽 먼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좌초한다. 구사일생으로 로빈슨 혼자만 이름 모를 섬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사방이 망망대해이고 인적 없이 열대의 수풀만 무성한 섬에 표착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로빈슨은 ‘탄식의 섬’이라며 한탄한다. 실의에 빠져있을 수만 없었던 로빈슨은 암초에 난파된 배에서 물품을 가져오고 섬을 답사하여 지도를 그리며 삶의 희망을 키워간다. 그리고 섬의 이름을 ‘스페란차’로 바꿔 부르기로 한다. 스페란차(Speranza)는 이탈리아어로 “희망”이라는 의미이다. 지독한 절망에 빠진 로빈슨은 진흙탕 속에서 동물 같은 생활을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스페란차에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를 건설한다. 스페란차는 로빈슨에게 삶의 터전일 뿐 아니라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아무도 모른다〉가 아이들이 방치된 이야기이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무인도에 표류한 이야기인 만큼 배경이 되는 203호와 스페란차는 타자의 접근이 차단된 고립된 공간이어야 한다. 그런 공간에 고독과 절망이 드리우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고레에다와 투르니에는 고립의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좌절을 딛고 일어 설 수 있는 힘이 자라는 곳 또한 같은 공간이다. 203호는 아이들이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 점차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는 근거지가 되고 스페란차는 로빈슨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터전이 된다.
∎ 아키라와 로빈슨
〈아무도 모른다〉에서 엄마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힘겨워하다 떠나고 만다. 장남 아키라는 그런 엄마를 대신에 힘든 상황에서도 다른 형제들을 돌본다. 아키라는 엄마와 함께 살 때도 일을 나간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해왔다. 아키라의 얼굴에는 활짝 웃는 소년의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다. 평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지내다가 가족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미소를 짓는 게 다다. 사랑을 찾아 며칠씩 집을 비우는 엄마를 대신해서 살림을 꾸려가고 동생들의 공부를 봐주느라 애어른이 된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돌아온다며 집을 나간 엄마가 소식마저 묘연하자 자신이 짊어진 굴레가 버거워진 아키라는 친구를 찾아 나선다. 오락실에서 만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생활비는 떨어져가고 가스비가 연체되지만 아키라는 친구들을 집에까지 끌어들이고 오락에 빠져 지낸다. 그간 돌봐왔던 아이들은 뒷전이다. 친구 중 한 명이 아키라에게 편의점에서 장난감을 훔치라고 시키는데 아키라가 이를 거부하자 친구들은 떠나버린다.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고독함을 견딜 수 없었던 아키라는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에 찾아가서 같이 놀자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아키라가 사는 집에서 음식쓰레기 썩는 냄새가 나고 집안이 엉망이라며 피한다. 따돌림을 당한 아키라는 우연히 자신과 같이 따돌림을 당하고 사키가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로빈슨이 무인도에 표착하여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악천후에서 생존한 로빈슨은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다. 좌초한 버지니아호로 가서 생활에 필요한 재료와 물건들을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고생 고생하여 섬을 탈출할 배를 건조하고 ‘탈출호’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육중한 배를 혼자 힘으로 바다로 끌고 갈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로빈슨은 진흙탕에서 배설물을 뒤집어쓰고 동물처럼 지낸다. 자신이 몽상에 빠져 미쳐가고 있음을 자각한 로빈슨은 수렁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농사를 시작하고 가축을 기르며 기록하고 시계를 만들어 문명화된 섬으로 변모시킨다. 거기에 더해 비록 혼자일 뿐이지만 섬의 헌장을 만들고 총독에 오른다. 섬에 아라우칸 족이 나타나 인신공양 의식을 치르는 것을 본 로빈슨은 요새를 건설하고 장군이 된다. 로빈슨은 건축, 조직, 입법, 군사 등 여러 방면에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외로움이라는 한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로빈슨은 섬의 여성성에 끌리고 섬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 로빈슨 앞에 죽을 위기에 처한 방드르디가 나타난다.
아키라와 로빈슨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키라는 부모의 부재라는 정서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자신과 동생들을 지켜야 했다. 로빈슨은 무인도 생활에 따르는 지독한 고독과 절망으로 인해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광기로부터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키라는 의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선택을 하지만 자신을 따돌린 친구들로 인해 쓸쓸함만 더할 뿐이었다. 로빈슨은 자신이 이룩한 문명 속에서도 이겨낼 수 없는 외로움을 섬에 해소해 보지만 인간성은 점점 상실되어 갔다.
∎ 사키와 방드르디
사키는 같이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힌 장소로 간다. 거기에는 사키를 집단으로 따돌린 학생들이 만든 사키의 사망 애도 카드와 조화가 놓여 있다. 우연히 사키를 따라간 아키라도 그것들을 같이 보고 만다. 학교를 빼먹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사키는 전기와 수도가 끊겨 아파트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아키라와 세 아이들을 만난다. 네 아이들과 친해진 사키는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로 간다. 아파트에 들어선 사키는 쓰레기로 엉망인 상황에 놀라는 눈치였지만 이내 아이들과 함께 어울린다. 사키는 유키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고 교코와 장난감 피아노를 같이 치며 동무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키라는 사키에게 호감을 느낀다. 사키는 집세가 밀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쫓겨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아키라에게 자신이 집세를 벌어주겠다고 한다. 사키가 돈을 버는 방법은 성인 남자와 가라오케에 가서 놀아주고 접대비를 받는 것이다. 사키는 그렇게라도 해서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사키가 그렇게 번 돈을 내밀자 사키를 내심 좋아하는 아키라는 그런 돈은 필요 없다며 뿌리친다. 어려운 상황에 약해져가던 제일 어린 유키가 의자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고 앓다가 죽는다. 죽은 유키에게 좋아했던 아폴로 초콜릿을 사주고 모노레일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보여주기 위해 돈이 필요해진 아키라는 사키를 찾아간다. 사키는 아키라에게 돈을 줄 뿐 아니라 남은 아이들이 치르는 유키의 장례식에 동참한다. 사키는 아키라와 함께 유키의 시신을 트렁크에 넣어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잘 보이는 공항 근처의 노지에 묻어준다. 공항에서 돌아온 사키는 아이들과 지내며 함께 커간다.
스페란차에 두 번째로 나타난 아라우칸족이 치르는 의식에서 인디언 혼혈아가 희생양으로 지명된다. 아이는 도망쳤고 로빈슨이 의도치 않게 그 아이를 구해주게 된다. 아이는 자신을 구해준 로빈슨의 발에 엎드려 주인으로 섬길 것을 맹세한다. 로빈슨은 아이에게 방드르디(금요일)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방드르디는 처음에는 로빈슨에게 복종하는 듯 했지만 갈수록 천방지축으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기상천외한 엉뚱한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옷과 보석을 가져다 선인장을 치장하고 논에 댄 물을 다 빼버린다. 거기에 더해 섬을 희롱하는 일까지 하다 로빈슨에게 걸려 흠씬 두들겨 맞는다. 그렇다고 방드르디의 행동이 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폭약과 곡식 등을 저장해둔 동굴에서 담배를 피우다 아무렇게나 파이프를 버려 로빈슨이 이룩한 모든 것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방드르디의 출현 이후 흔들리던 로빈슨의 마음은 폭발과 함께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제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노예가 아니라 그의 형제이자 안내자이자 스승이 된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에게 유희를 가르친다. 방드르디는 숫염소 앙도아르를 잡아 연을 만들고 악기를 만든다. 로빈슨은 방드르디와 함께 연을 날리며 대지의 존재에서 하늘의 존재로 거듭난다.
사키와 방드르디는 아키라와 로빈슨에 대비되는 인물이다. 사키는 학교에 다니며 고급 주택에 살지만 네 아이들을 위해 집세를 마련하고자 성인 남자와 노는 일탈을 서슴없이 감행한다. 하지만 아키라는 학교는커녕 출생 신고조차 되어있지 않은 처지에 집에서 쫓겨 날 위기에 내몰리지만 편의점에서 폐기임박 식품을 얻어 다 먹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키라가 규율과 제도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사키는 그것을 뛰어넘은 생존 능력을 보여준다. 사키의 합류로 다시 넷이 된 아이들이 험난한 세상을 향해 밝은 모습으로 나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종영한다. 방드르디와 로빈슨의 관계도 그와 다르지 않다. 로빈슨이 규율을 중시하고 엄격하고 진지하며 편집광적인 반면 방드르디는 규율 따위는 안중에 없고 쾌활하며 놀기를 좋아한다. 고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로빈슨은 방드르디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로빈슨으로 다시 태어난다. 로빈슨은 고대하던 배가 나타나 스페란차를 떠날 기회를 얻지만 섬에 남는 선택을 한다.
지금까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고레에다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에 대해 내러티브의 유사성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모른다〉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는 1988년 도쿄의 아파트와 18세기 태평양의 무인도라는 배경에서 차이를 보이고 무인도 표류기와 네 아이 방치 사건이라고 하는 소재에서 상이하다. 하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는 공간이 갖는 의미, 주인공들이 겪는 역경, 그리고 타자로서 등장하지만 주인공들에게 자유를 주는 이들의 역할에서 일치하는 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스토리가 진행되는 공간 203호와 스페란차는 타인과는 고립된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네 아이와 로빈슨이 절망을 딛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는 터전이 된다. 주인공인 아키라와 로빈슨에게는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운명의 짐이 지어진다. 두 사람은 그러한 상황을 회피하고자 타자에 의지해 보지만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느낀다. 분명히 사키와 방드르디는 주인공들과는 상반된 캐릭터이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새롭게 태어나는 촉매 같은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 들뢰즈의 영화 철학의 눈으로 바라본 〈아무도 모른다〉
들뢰즈는 현대 사회에서 영화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현대 사회는 미디어가 장악한 사회이다. 미디어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며 현대인들은 단 하루도 미디어에서 벗어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거대 기업에 의해 산업화된 미디어는 문화를 획일화하고 의도된 정보를 제공하고 오락성과 선정성과 폭력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한다. 들뢰즈는 영화를 대중의 사유를 획일화로 이끄는 미디어에 저항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한다. 들뢰즈는 영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미디어에 가려진 현실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게 하고 주입된 이성적 사유가 아닌 낯설게 볼 수 있는 감성적 사유를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경험을 한 관객은 획일성에서 벗어나 차이를 인식하게 되고 미디어에 길들여진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꿀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한다.
〈아무도 모른다〉의 모티브가 된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미디어는 “음란마귀 어머니” “지옥의 아이들” “무책임한 섹스” 등 자극적인 제목으로 선정적인 보도를 내보낸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러한 미디어의 보도에 의문을 품고 외부의 일방적인 시선이 아닌 방치된 아이들에게 있었을 ‘풍요로움’에 포커스를 맞춰 영화를 만든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엄마뿐만 아니라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은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돈이 떨어지고 가스와 수도와 전기가 끊겨 생활을 이어갈 최소의 여건마저 차단된다.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아이들의 삶도 무참하게 무너져 버렸을까? 냉혹한 시선으로 방치된 아이들을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이라면 당연히 비참한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생각은 다르다. 아파트에 갇힌 채 무력감에 빠져들던 아이들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희망적인 선택을 한다. 아파트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와 자유를 만끽한다. 비록 편의점 폐기임박 식품으로 연명하는 상황에서조차 아이들에게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끈끈한 정과 활기찬 생명력이 넘친다. 그러한 사랑과 에너지는 따돌림을 당해 갈 곳을 잃은 사키조차 품어 안을 만큼 넉넉하다.
고레에다 감독은 자신이 〈아무도 모른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방치된 아이들에 대한 시시비비나 사회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자서전인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거기서 사는 듯이 아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것. 그리고 그 풍경을 그들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를 통해 그들의 말을 독백(모놀로그)이 아닌 대화(다이얼로그)로 만드는 것. 그들 눈에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것. 제가 원했던 건 이러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우리가 선입견에 빠져 보는 익숙한 이성적 시선이 아니라 낯설게 볼 수 있는 감성적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고레에다 감독이 방치된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의도에만 치우쳐 영화를 만들었다면 제목을 과거 시제인 ‘아무도 몰랐다’로 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은 방치된 아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선입견에 빠진 사람들이 지금이라도 알아차리기를 호소하기 위해 현재 시제인 ‘아무도 모른다’를 제목으로 정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철학은 들뢰즈의 그것과 통하는 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모른다>는 들뢰즈 영화 철학을 실현한 영화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04, 〈아무도 모른다〉, (주)디스테이션.
- 미셸 투르니에, 김화영 역,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2016.
-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역,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바다출판사, 2017.
-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역,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바다출판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