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은 1898년 23살의 나이로 태화산 마곡사에서 출가했다. 선생은 반년가량 머물며 수행하다 이듬해 떠났다. 선생이 마곡사를 다시 찾은 때는 1946년 71세였다.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 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후였다. 마곡사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삭발바위, 백범 명상길과 백련암, 백범당과 향나무. 템플스테이에서 찾았던 선생의 행적을 백범일지(白凡逸志)의 기록을 따라 다시금 음미해보았다.
23세살의 청년 김창수(金昌洙)는 늦가을에 계룡산에 있는 동학사(東鶴寺)에 다다랐다. 김창수는 탈옥수였다. 1895년에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의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이미 18세에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김창수는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다음해인 1896년 3월에 김창수는 국모 시해에 대한 보복으로 한 일본인을 황해도에서 살해했다. 김창수는 5월에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고 7월에 인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재판을 받고 11월에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김창수를 살린 것은 고종의 특명이었다. 고종은 김창수가 처한 소식을 접하고 사형 집행정지령을 내렸다. 미결수로 옥중 생활을 이어가던 김창수는 1898년 3월에 탈옥했다. 경성에서 은거하던 김창수는 4월에 삼남지방으로 유랑을 떠났다. 천안, 아산, 남원, 무안, 목포, 해남, 장흥, 보성, 화순, 순창, 하동을 거치는 5달 남짓의 방랑 중에 들른 곳이 동학사였다.
김창수는 동학사에서 이서방이라는 유산객(遊山客)을 만났다. 유산객이란 말 그대로 산천을 구경하며 놀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글깨나 읽은 사십대의 양반으로 보이는 이서방은 자신은 공주에 살며 홀아비로 사설 글방의 훈장을 지냈다고 소개했다. 그러자 김창수는 개성 출신으로 장사에 실패해 강산 유람하다 귀향하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그 말을 듣고 이서방은 마곡사 구경을 가자고 청했다. 아버지로부터 마곡사와 화담 서경덕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던 김창수는 마음이 움직여 이서방과 함께 마곡사로 향했다. 마곡사로 가는 도중에 이서방은 김창수에게 함께 출가하여 일생을 편하게 살기를 권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인 김창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저녁 무렵 마곡사 입구에 도착했다. 그때의 심경을 백범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멀리서 저녁예불을 알리는 인경소리는 모든 번뇌를 떨쳐버리라는 소리같이 들렸다. 저녁 안개가 산 밑의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방황하는 자의 더러운 발길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대고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고 어서 들어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이서방은 계속 출가하기를 채근했고 김창수는 일단 절에 가서 상황을 살피자며 즉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김창수는 마곡사에 끌렸다. 안개를 헤치고 들어가는 마곡사는 김창수에게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世間, 속세)에서 출세간(出世間)으로 옮겨”간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김창수는 이서방을 따라 마곡사 경내로 들어갔다. 매화당(梅花堂)을 지나 마곡천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를 건너 요사채인 심검당(尋劒堂)으로 들어갔다. 이미 마곡사에 연줄이 닿아있는 이서방 덕분에 김창수는 저녁밥을 얻어먹고 하룻밤을 기거할 수 있었다. 하은당이라는 노승이 찾아와 “고명한 대사 밑에서 불학(佛學)을 배우고 익혀서 장차 큰 강사(講師,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가 되게 해줄 터이니 자기의 상좌가 간곡히 되어달라고 청했다. 김창수는 자질이 모자라다고 사양했다. 이튿날 벌써 삭발한 이서방이 찾아와 하은당은 절에서 제일 부자인 보경대사의 상좌여서 어서 출가하라고 권했다. 김창수는 번뇌와 속세의 티끌 하나 없는 청정법계(淸淨法界)에 들어선 마음이 들어 출가를 승낙했다. 삭발은 마곡천변에서 했다. 그때의 상황이 백범일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얼마 뒤에 사제(師弟, 상좌보다 나이어린 중) 호덕삼(扈德三)이 체도(剃刀, 머리털을 깎는데 쓰는 칼)를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호덕삼이 삭발 진언(嗔言)을 쏭알쏭알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한 일이지만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현재 마곡사에서는 천변에 있는 큰 바위를 ‘삭발바위’로 지정해 홍보하고 있다. 삭발바위에 다가가니 물살의 흐름이 빠르고 수심이 깊었다. 아무래도 잘린 상투가 모래 위에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장소다. 내 생각에는 모래톱이 있는 물가에서 삭발했지만 뭔가 기념이 될 만한 장소로 특정하기 어려워 물가의 바위를 삭발바위로 지정한 것은 아닌가 싶다. 삭발바위가 냇물을 향해 기울어져 있어 올바로 서있기도 녹록하지 않은데 과연 삭발하기에 적합했을까. 어쨌거나 수량에 따라 있다가 없다가 하는 모래톱보다는 육중한 바위가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기에 걸맞은 것은 틀림없겠지.
마곡사에는 수백 명의 승려가 모였다. 득도식(得道式)에서 김창수가 하은당을 은사로 받들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부여받는 의식이 치러졌다. 속세의 김창수는 불가의 원종으로 다시 태어났다. 수계식(受戒式)에서 용담 화상(龍潭 和尙)은 그에게 오계(五戒, 생명을 죽이지 말 것, 남의 것을 빼앗지 말 것, 간사하고 음란한 짓을 하지 말 것, 거짓말을 하지 말 것, 술 마시지 말 것)를 따르도록 알려주었다. 예불이 끝나자 그는 절하는 법을 연습하고 『진언집(眞言集)』과 『초발자경(初發自經)』으로 절에서 지켜야 할 기초 법도를 배웠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절 생활은 우여곡절이었다. 그가 상좌가 되어주기를 간청했던 하은당의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얘, 원종아”라고 부른 것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생긴 것이 미련해서 고명한 중은 될 성싶지 않구나. 또 얼굴은 어쩌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꼬! 얼른 나가서 물도 긷고 장작도 패거라” 하며 종 부리듯 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앞개울에 가서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렸다. 은사가 어찌나 심하게 야단을 쳤던지 보다 못한 보경당 노스님께서 한탄을 했다. “전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 하여 상좌로 데려다주면 못살게 굴어 다 내쫓더니만, 이번에도 그렇겠구나. 원종이도 잘 가르치면 장차 제 앞가림은 할 텐데, 또 저모양이니 며칠이나 붙어 있을꼬!”
백련암은 마곡사에서 1km 정도 떨어진 산중턱에 있는 암자다. 마곡사를 출발해 은적암과 백련암을 거쳐 생골에서 다시 마곡사로 돌아오는 코스를 ‘백범 명상길’로 정해 홍보하고 있다. 맨손으로 직접 걸어보니 산보하기에 무리 없는 코스다. 하지만 원종에게도 그랬을까. 원종은 백련암에서 수행 생활을 했다. 늦은 가을에 출가했으니 그해 겨울을 백련암에서 났을 게 분명하다. 지게에 물통 두 개를 지고 미끄러운 산길을 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일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물통을 깨뜨렸다는 핑계로 성미가 고약한 은사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누군가에게는 한가로이 즐길 명상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생스러운 눈물길이었다.
원종의 절 생활에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보경당 노스님은 하은당에게 구박당한 원종을 위로했다. 불학의 핵심을 모아놓은 『보각서장(普覺書狀)』을 가르쳐준 수계사 용담스님과 상좌인 혜명도 위안이 되는 말을 건네곤 했다. 스님들 중에는 원종을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보경당 노스님과 하은당 은사가 관리하는 재산이 어마어마했고 두 스님 모두 칠팔십 살 노인들이어서 입적 후에는 젊은 원종의 차지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종의 마곡사 생활은 봄을 넘기지 못했다. 질긴 속세 인연에 대한 집착은 원종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백범일지에 원종이 속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어수선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작년에 인천감옥을 탈출하면서 헤어진 뒤로 생사마저 알 수 없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때 나를 구출하기 위해 가산을 다 써버리고 끝내고 몸까지 망치고 만 김주경의 소식도 궁금했다. 또 해주 비동의 고후조 선생도 보고 싶고, 청계동 안진사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때 안진사가 천주학을 하겠다는 것을 대의를 거스르는 행동으로 오해하여 불평을 품고 청계동을 떠났는데, 다시 만나면 지난달의 오해를 사과해야겠다는 생각 등이 수시로 가슴속을 채웠다.
원종에게는 더 이상 청정적멸(淸淨寂滅, 번뇌 없이 깨끗한 열반의 세계)의 도법에 일생을 바칠 마음이 없었고 보경당 노스님의 재산도 유혹 거리가 되지 못했다. 원종은 보경당 노스님께 금강산으로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며 절을 떠나겠다고 했다. 노스님은 그럴 줄 알았다며 하은당의 반대를 물리치고 쌀 열 말과 함께 가사와 바리때를 챙겨 주었다. 원종은 쌀을 팔아 마련한 노자로 경성으로 떠났다.
원종이 마곡사에서 보낸 6개월은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 길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 데는 기간이 길고 짧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종이 김창수로 사방을 떠돌 때 마음속을 채운 건 영웅심과 공명심이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보통 양반에게 당한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삿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불법수행하며 그러한 생각은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뿐만 아니라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잊으라는 뜻인 ‘견월망지(見月忘指)’의 오묘한 이치에 대해 배웠고, ‘참을 인忍’자에 칼날 같은 마음을 품는 뜻이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깨달음과 가르침은 원종이 훗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큰 뜻을 펼치는 데 밑거름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마곡사를 떠난 24살의 청년은 조국의 독립에 헌신했고 광복을 맞아 70세의 노구로 금의환향했다. 다음 해 선생은 38선 이남의 지방 순회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인천을 찾았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이 마곡사였다. 마곡사는 선생이 “가장 인상 깊고 신세 진 곳”이라고 회고했을 만큼 마음 깊이 자리 잡은 공간이었다. 선생이 마곡사를 찾는다는 기별에 승려들의 선발대가 공주까지 마중 나왔다. 떠날 때는 이름 없는 승려였지만 일국의 주석으로 돌아오니 마곡사 입구에는 비구들과 비구니들이 도열하여 환영했다. 48년 만에 돌아온 마곡사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없네’라는 말은 옛 시인의 허사가 아니었다.
대광보전(大光寶殿) 정면의 6개의 평주(平柱)에는 각각 주련(柱聯)이 걸렸다. 능엄경 제6권에 실린 불경 구절인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이다. 그 뜻을 새기면 “맑음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해서 고요하게 비침이 허공을 삼키니 돌아와 세간을 보건댄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 비록 여러 감각기관의 움직임이 있지만, 핵심은 하나의 중심을 잡는 데 있네.”이다.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위엄스럽고 신통함을 받들어 읊는 게송 중 일부이다. 하지만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선생에게는 유독 “돌아와 속세의 일을 회상해 보니 (却來觀世間)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猶如夢中事)” 구절이 가슴에 사무쳤다. 마곡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선생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선생은 1948년에 마곡사에 장기간 머물며 조국의 미래에 대한 웅대한 계획을 구상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남북으로 갈라진 급박한 정치 상황에 선생의 마곡사 행은 유보되고 말았다. 1949년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절명하며 마곡사와의 인연도 끝나고 말았다.
마곡사 경내에서 선생을 기념하는 백범당(白凡堂)을 찾았다. 선생의 등신대가 오는 사람들을 맞는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선생이 말이라도 걸어올 것만 같다. 벽에는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한시 액자가 걸려 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을 밟고 들판을 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迹(금일아행적) 오늘 내 발자취가
逐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뒷사람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당 옆에는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자라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같이 심었다는 무궁화는 소실되어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백범일지의 마지막 장은 「나의 소원」이다. 소원을 묻는 하나님에게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선생은 1903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래서 1947년에 집필한 「나의 소원」에서 선생의 소원을 묻는 절대자는 하나님이다. 만일 선생이 개종하지 않아 부처님이 선생의 소원을 물었더라도 당연히 조국의 독립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마곡사 템플스테이에서 선생의 자취를 밟으며 선생이 걸었던 길과 지극한 조국 독립의 소원을 곱씹어 본다.
∎ 참고 문헌
-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김구 지음, 배경식 풀고보탬, 너머북스, 2010.
- 한상길, 「백범 김구와 불교」, 『대각사상』 29집, 대각사상연구원,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