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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Aug 19. 2021

최부의 시(詩)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이야기 (2)


1. 『표해록』과 최부의 시(詩) 

   

『표해록』에는 최부의 시(詩)가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표해록』을 기행문이라고 봤을 때 문사(文詞)에 뛰어났던 최부가 중국의 관리들과 시(詩)를 나누지 않았을 리가 없다. 최부가 시(詩)를 지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총병관 등의 세 사상은 곧 신에게 다과를 대접하고 이어서 단자를 써서 내려주었습니다. 단자 속에는 “최관에게 예물로 돼지고기 1쟁반, 거위 2마리, 닭 4마리, 물고기 2마리, 술 1동아리, 쌀 1쟁반, 호두 1쟁반, 채소 1쟁반, 죽순 1쟁반, 대추 1쟁반, 두부 1쟁반을 보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 반찬과 식량 등 물품을 배리와 군인에게 차등 있게 내려주었습니다. 신은 곧 사례하는 시를 지어 두 번 절하니 세 사상들도 일어나 공손스레 답례하였습니다. (2월 4일 일기)  

   

역승 하영이 시 세 절구를 지어주므로 신도 화답하였습니다. (2월 15일 일기)   

  

두 대인은 다 묻고 나서 외랑을 시켜서 쌀 1쟁반, 두부 1쟁반, 국수사리 1쟁반을 받들고 와서 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시를 지어 사례하였습니다.

또 정씨 성을 가진 관원이 약헌의 시에 화운해 주기를 청하기에 바로 차운해 주었더니, 그 관인이 또 쌀 6되, 거위 1마리, 채소 1쟁반, 호두 1쟁반을 보내왔습니다. (2월 17일 일기)

     

낭중 등은 신에게 표류해온 일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는 않고, 뜰 안의 홰나무 그늘을 가리키며 시제를 삼고는 절구를 짓도록 하고, 또 도해로써 시제를 삼고 당률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3월 29일 일기)  

   

최부는 제공받은 음식에 대해 시(詩)로 사례했고 시(詩)를 지어준 상대에게 시(詩)로 답례했다. 북경에 도착했을 때 최부는 병부 낭중의 요구에 응하여 절구(絶句)와 당률(唐律, 당대(唐代)의 율시(律詩))을 지었다. 

최부의 시(詩)뿐만 아니라 중국 관원들과 나눴던 시(詩)를 볼 수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을 『표해록』에서 찾을 수 있다.

     

황혼을 틈타 마을 사람들이 신의 모자갑을 훔쳐 갔는데 모자갑 속에는 사모⋅낭패와 강남 사람이 지어 준 시고가 들어있었습니다. 정보가 오새에게 알려서, 마을 사람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오새가 신에게 말하기를, “소홀이 간수하여 도적을 불렀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5월 29일 일기)

     

최부 일행이 요동을 떠나 현득채리(顯得寨里)라는 마을에서 쉴 때 모자갑[帽匣]을 도난당했는데 그 속에 들어있던 시고(詩藁)도 같이 잃어버렸다. 당사자인 최부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표해록』을 읽는 후세의 사람들에게도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비록 최부의 시(詩)는 볼 수 없지만 시(詩)에 대한 최부의 생각은 『표해록』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윤정월 19일 최부 일행이 영파부 도저소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가난한 선비라 칭하는 노부용이란 자가 최부에게 시를 지을 줄〔作詩〕 아느냐고 묻는다. 이에 최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시사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나는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을 공부하였지 시사를 배우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소. 먼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 (윤정월 19일 일기)

     

최부는 단지 자신의 흥취를 표현하려고 시(詩)를 짓는게 아니라고 했다. 성학(聖學)을 공부하여 인격 수양〔操存省察〕을 지향했던 최부에게 시(詩)는 단지 예(禮)에 어긋나지 않게 소통하는 도구였음을 분명히 했다.

최부가 시(詩)를 지을 때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2월 4일에 소흥부(紹興府)에 도착했을 때 총병관 등의 세 사상(使相)가 최부 일행에게 음식을 베푼다. 이때 최부가 사례한 시(詩)를 보고 “당신의 사례하는 시를 보건대 이 지방 산천을 어찌 그리도 자세히 알고 있소? 이는 필시 이곳 사람이 말해 준 것이겠지요?”라고 묻는다. 이에 최부는 

    

“사방을 돌아봐도 친한 사람이라곤 도무지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얘기를 하겠습니까? 내가 일찍이 중국의 지도를 훑어보았기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여 기억나는 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2월 4일 일기)

     

라고 답한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교정에 참여했던 최부가 중국의 지리와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단정한다. 최부가 그러한 자신의 지식을 시(詩)를 통해서 드러내자 현지의 중국 사상들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부가 항주에 머무를 때 이런 일도 있었다.   

  

그 성명은 잊었지만 이절의 벗이 《소학》 1부를 소매 속에 넣어 이절을 통하여 신에게 주고 시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공로도 없으면서 남이 주는 것을 받는다면 이는 염치없는 짓이므로 감히 사양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시가 한 장을 구하여 기념으로 삼고자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여, “시를 잘 짓지도 못하고 글씨도 또한 좋지 못한데 좋지 못한 것으로서 남의 좋은 것과 바꾸는 일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책을 도로 소매 속에 넣고 가버렸습니다. 이절이 신에게 말하기를, “도리로써 사귀고 예절로서 대접하면 공자께서도 또한 받사온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물리치시는 것인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책을 기꺼이 주려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시를 얻는 데 있었습니다. 도리로써 사귐이 아니고 예절로써 대접함이 아니니, 내가 만약 한번 받는다면 이는 시를 값을 받고 파는 셈이므로 이를 물리친 것입니다.” (2월 9일 일기)  

   

조선에서 온 선비가 항주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북경사람 이절의 친구가 《소학》 1부를 주고 시(詩)를 받고자 하자 최부는 단호히 거절했다. 시(詩) 또한 예절의 연장(延長)이라 생각했던 최부에게 책을 주고 대가로 시(詩)를 바라는 일은 참을 수 없는 무례(無禮)였으리라.    

 

2. 최부의 다른 시(詩)들     


『표해록』에서 최부의 시(詩)를 볼 수 없었는데 남아있는 시(詩)마저도 거의 없어 애석하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부의 시(詩)는 「독송사(讀宋史)」, 「계축시(契軸詩)」,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세 편뿐이다.

최부의 외손자 미암 유희춘이 쓴  「금남선생 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에 

    

선생이 이미 혹독하게 죽임을 당하고, 또 대(代) 이를 아들이 없어서 그의 평생 저술이 흩어져 없어짐에 열 중 두셋도 남지 않았다. 희춘이 60년 뒤에 수습하여 겨우 소(疏)ㆍ기(記)ㆍ비명(碑銘) 일곱 수와 함께 《동국통감론(東國通鑑論)》 120수를 얻어 책 두 권을 만들어 간행하여 장래에 전하니 그 기절(氣節)의 굳세고 특이함과 경륜의 규모(規模)와 의론(議論)의 정밀하고 간절함을 여기에서 살펴보면, 거의 그 한 실마리를 알 수가 있다.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 10월 계사에 외손 통정대부 전라도 관찰사 유희춘은 삼가 쓰노라.   

  

라 적고 있다. 최부는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단천(端川)에 유배되었고,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斬刑)을 당했다. 최부가 죽은 지 반세기도 넘어 유희춘이 외조부의 글을 모아 『금남집(錦南集)』을 엮었다. 그때 이미 최부의 많은 글이 사라져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더구나 최부의 시(詩)는 한 편도 없었다. 최부가 스승 김종직의 문집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를 당했고 6년 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라는 연산군의 명령에 참형을 당했다. 연이은 두 번의 사화(士禍)에 최부의 글이 무사할 리 없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최부가 ‘먼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하거나 사례하기 위해 시(詩)를 지었기에 최부와의 관계를 숨기려는 사람들이라면 최부의 시(詩)를 없애야만 했으리라. 젊어서부터 최부와 교유했던 송석충(宋碩忠)조차 무오사화가 일어나서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자신의 저술을 불태우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이상 人間事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 「독송사(讀宋史)」 

    

「독송사(讀宋史)」는 허균이 편찬한 시화집(詩話集)인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시집(詩集)인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실려 있다. 

     

挑燈輟讀便長吁 등심지 돋우며 읽은 책 덮고 문득 길게 탄식하니

天地間無一丈夫 중국 천지에 대장부라 할 사람 하나 없구나

三百年來中國土 삼백 년 이어온 중국 땅을

如何付與老單于 어찌 늙은 선우에게 내어 주었나 

    

허균은 『학산초담』에서 ‘최부의 시는 흔히 볼 수 없다〔溥詩不多見〕’라는 말과 함께 ‘시가 침착하고 노련하니, 그 사람 됨됨이를 짐작할 만하다〔沈者老蒼 可想其爲人〕’라 평했다. 또 『국조시산』에서는 ‘비장하다가도 기세가 갑자기 꺾이니 다시 보게 한다〔悲壯頓挫 令人改觀〕’라 논평했다.

최부는 송나라가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1279년 애산해전(崖山海戰)을 읽고 나서 북받치는 감정을 시(詩)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 늙은 선우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1215~1294)을 말한다. 애산해전에서 송나라 병사들은 몽골 군대에 포위되어 먹을 게 없어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며 버텼으나 완전히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수백 척이나 되는 함선이 가라앉았고, 수만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7살의 소제, 황제의 어머니인 양 태후를 비롯한 황족들, 신하들이 다 바다에 빠져 자살하였다. 몽골 기록에 따르면 다음 날 떠오른 시체만 10만 구였다고 전해진다.

1485년 전적(典籍)으로 있을 때 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했던 최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에도 박식했다. 최부는 「독송사(讀宋史)」를 읽는 후세들이 송나라의 비참한 멸망을 뼈저린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를 바랐으리라.   

  

4. 「계축시(契軸詩)」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 「역조구문(歷朝舊聞)」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성종 때에 최부(崔溥)가 사간이었고, 정광필(鄭光弼)ㆍ남곤(南袞)은 좌ㆍ우 정언이었다. 최부가 계축(契軸)에 시를 지어 썼는데 그 끝 구에 

    

後人指點摩挲處   뒷날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고 어루만질 적에 

不知某也回某也忠 누가 간사하고 누가 충성되다 할는지 모르겠노라 

     

하였다. 최공의 이 글귀가 비록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겠지마는 그 글 뜻을 음미해 보면 오로지 (충성된 정광필과 간사한 남곤) 두 분의 훗날 행사를 가리켜 말한 것 같다. 군자의 한 마디 말은 충성된 사람이나 간사한 사람의 거울삼는 경계가 되는 것이니, 참 두려운 일이로다.

     

박동량은 최부가 사간으로 있을 때 계축에 시(詩)를 썼는데 정광필과 남곤이 정언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최부가 시(詩)를 쓴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유희춘의 『미암집』에서  찾을 수 있다.

     

【12월 25일】 금남(錦南) 선생의 사간 계축(司諫契軸)이 왔다. 이것은 홍치(弘治) 정사년(1497) 2월에 만든 것인데 대사간(大司諫) 이복선(李復善), 전 사간(司諫) 윤석(尹晳), 조산대부(朝散大夫) 수 사간(守司諫) 최모(崔某 최부) 연연(淵淵), 헌납(獻納) 오릉(吳凌), 정언(正言) 조문기(趙文紀), 전 정언(正言) 정광필 사훈(鄭光弼士勛), 정언(正言) 남곤 사화(南衮士華)가 들어 있었다. 조상의 옛 물건을 80년 뒤에 보게 되니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유희춘은 1572년 12월 25일 일기에서 1497년 2월에 만든 최부의 사간 계축을 입수하였다고 적고 있다. 계축에는 정광필과 남곤의 기록도 함께 남아있다고 했다. 최부는 1496년(연산군 2년) 11월 30일부터 다음해 2월 28일까지 사간원 사감을 지냈다. 정광필은 1496년 8월 11일부터 같은 해 11월 18일까지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남곤은 정광필의 뒤를 이어 1496년 11월 18일부터 1497년 6월 14일까지 정언을 지냈다. 최부는 사간 계축에 시(詩)를 남겼고, 그 마지막 구만이 전해 내려왔으리라 보인다.

박동량은 계축시의 시구(詩句)를 빌어 최부가 정광필을 높게 남곤을 낮게 평가하고 것처럼 후술하고 있다. 김육(金堉, 1580~1658)이 지은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화매(禍媒)」의 남곤전(南袞傳)에서 ‘사문(斯文) 최부(崔溥)가 일찍이 남곤을 소인의 재질이라고 말하였다〔崔斯文溥嘗稱小人才〕’라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최부가 남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사료는 없다. 1576년 10월 13일 일기에서 남곤을 간신〔姦臣南袞〕이라 지칭했던 유희춘도 최부가 남곤을 어떻게 일컬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최부가 사간으로 있을 때 정언 남곤과의 끈끈한 관계를 헤아릴 수 있게 하는 기록을 『연산군일기』에서 찾을 수 있다. 1467년 2월 26일 연산군이 최부를 성절사 질정관으로 임명하며 사간에서 해임하자 다음날 정언 남곤이 최부를 사간에서 교체하지 말라고 주청한다. 

아마도 박동량의 후술은 정광필과 남곤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최부의 시구(詩句)를 교묘하게 연결한 악마의 편집일 따름이라 생각된다. 최부의 「계축시(契軸詩)」 전문(全文)을 볼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5.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성종은 최부에게 어승(御乘, 임금이 타는 말)을 골라서 바치고 목장을 살피고 숨은 장정을 헤아리고 양민과 천민을 구분하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없애라 명하며 제주3읍추쇄경차관에 임명했다. 1487년 9월 17일 최부는 대궐에서 하직하고 떠나 전라도 해남현의 관두량(館頭梁)에서 제주로 가는 배를 기다렸다. 11월 11일 아침에 제주의 신임 목사(牧使)인 허희(許熙)와 함께 탄 배가 관두량을 떠나 이튿날 저녁에 제주의 조천포(朝天浦)에 정박하였다.

최부는 조천관에서 유숙하며 제주의 관리들과 향교 교생들을 만났다. 칠팔일 후에 허목사(許牧使)와 대정현(大靜縣)과 정의현(旌義縣)을 순시했다. 최부는 제주의 산천(山川)⋅인물(人物)⋅풍속(風俗)⋅토산(土産)⋅관방(關防)⋅교량(橋梁)⋅관우(館宇)⋅사사(祠祀)⋅고적(古蹟)을 두루 볼 수 있었다. 최부는 이어 제주에 소장(所藏)된 역사 기록을 찾았으나 관부(官府)의 화재(火災)로 소실(燒失)된 상태였다. 

최부는 천여 년이나 되는 제주의 연혁(沿革)과 유적(遺跡)이 사라져 안타까웠다.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 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교정하면서 얻은 지식과 야사(野史)와 보고 들은 것들을 간추려 12월에 「탐라시삼십오절(羅詩三十五絶)」을 지었다. 최부는 자신의 시(詩)를 제주에 보관하여 후일에 참고가 될 문헌(文獻)이 되기를 바랐다. 

    

(1)

渤海之南天接水 발해 남쪽 하늘, 바다와 이어져

鰌潮鼉浪無涯涘 거센 물결 가도 가도 끝이 없네

耽羅國在渺茫中 탐라국은 멀고도 아득하게 있으니

一點彈丸六百里 한 점 탄환 같은 섬, 둘레 육백리     

(2)

中有靑螺駕六鰲 섬 가운데 푸른 산이 육오(六鰲) 등에 올라탄 듯하고 

巨靈擘破勢周遭 거령(巨靈)이 쪼개 놓은 듯 빙 둘러싼 산세(山勢)로다 

撑天圓嶠無頭處 높고 높은 원교산(圓嶠山), 머리가 없는 곳에

翠壁一里千尺高 일리(一里)를 이어진 푸른 절벽은 천척(千尺)만큼 높구나      

(3)

誰從壁頂鑿靈沼 누가 절벽 꼭대기에 영소(靈沼)를 파놓았는데 

啣蛤幾廻貢貢鳥 공공조는 몇 번이나 조개를 물어 날랐던가

拆峙山房果若然 높은 언덕이 헐려서 되었다는 산방산(山房山) 그럴 듯하여

奇觀問却知多少 기이한 경관 물으니 얼마나 많은가     

(4)

蒼松綠竹紫檀香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와 자단은 향기롭고

赤栗乳柑橘柚黃 적율과 유감와 귤과 유자는 노랗게 익어가고

白雪丈餘紅綿樣 흰 눈이 한길 남짓 쌓여도 붉은 솜 같으니

四時留得靑春光 사시사철 푸른 봄빛이 지니고 있네.     

(5)

世傳東角東巫峽 동녘 모퉁이 동무 골짜기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어

絃管遙聞第幾疊 풍악 소리 멀리서 들리니 몇 번이던가 

百里香雲繚繞中 백리의 상서로운 구름 휘감고 도는 중에

仙曹此處應登躡 신선의 무리가 올라온 때라 하네     

(6)

俯瞰人間隔世蹤 내려다보면 사람과 자취가 끊어진 곳이라

海中別有瀛洲峯 바다 가운데 별천지인 영주봉이 있으니

秦童漢使枉費力 진나라 동자와 한나라 사자는 헛된 곳에 힘만 쓰고

遺與三韓作附庸 버려진 채 남아있다 삼한의 부용국〔부속국〕이 되었다네     

(7)

南畔是山北畔海 남쪽은 산을 마주하고, 북쪽은 바다를 등졌고

毛興古穴中間在 그 사이 옛날의 모흥혈이 남아 있으나

雲烟埋沒事茫然 구름과 안개에 묻혀 옛일은 아득한데

欲問遺風今幾載 그 풍속이 몇 해나 전해 왔는지 모르겠네     

(8)

憶昔神人開國初 옛날 신인들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山從遊獵水從魚 산에서 사냥하고 물에서 고기 잡으니 

身如野鶴無歸着 몸은 두루미처럼 여기 저기 돌아다녀

地濶天高未有廬 땅 넓고 하늘 높은데 움막조차 없었다네     

(9)

石函當日來何處 돌함은 그 시절에 어느 곳에서 떠왔는가

知向郊原播稷黍 들판에 나가 곡식을 피 기장 씨를 뿌릴 줄 알았으니

歲久朱陳成一村 오랜 세월 지나 주씨⋅진씨 한 마을 이루듯

子孫乃爾多如許 자손이 그리하여 이와 같이 많구나     

(10)

星芒初動雞林天 계림의 하늘에 이상한 별이 처음으로 나타난 뒤에

已艤耽津一葉船 탐진 바닷가에 배 한 척이 닿았네

恰似老人朝北斗 흡사 노인성(老人星)이 북두성(北斗星)을 뵙듯이

從今始與通人烟 이때부터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네     

(11)

好爵旋封兄及弟 좋은 벼슬 형제에게 두루 봉하니

榮還故國傳來裔 영광스레 고국에 돌아와 후손에게 전해졌네

梯航疑叩不辭頻 산 넘고 물을 건너 잦은 조공도 사양치 않고

朝事新羅暮百濟 처음엔 신라를, 나중에는 백제를 섬겼네     

(12)

松岳龍興掃黑金 송악에 용〔왕건〕이 일어나 나타나 흑금〔궁예〕를 쓸어내니

預先歸去獻其琛 먼저 돌아가 보배를 바쳤네

奈何變作逋迯藪 어찌하여 일변해서 도망자의 소굴이 되어

流入胡元染惡深 오랑캐 원나라가 들어와 못된 풍습 물들였나     

(13)

候風島口金方慶 후풍도[추자도] 입구에는 김방경이고

明月浦頭都統瑩 명월포 어귀에는 도통사 최영이네

前後旌旗盖海來 앞과 뒤의 많은 군사 바다를 건너올 때

渠心厭亂知相應 저들도 난리를 싫어하여 서로가 내응했네     

(14)

通精暴血濺池潢 김통정의 거친 피 쏟아져 웅덩이 이루고

哈赤頑魂飛劒鋩 합적의 완악한 혼 칼끝에 흩어졌네

網盡鱣鯨付鼎鑊 큰고기 모두 잡아 정확에 삶았더니

年來無復海波揚 여러 해 전부터 거친 파도 다시 일지 않았네     

(15)

到頭安堵復蘇息 마침내 안도하여 다시 소생하여 안식을 취하니

弋獵謀生任所得 사냥하며 살길을 도모하여 임소를 얻었네

解棹扁舟向北風 작은 배를 풀어 북풍을 향하니

却將土物供臣職 마침내 토산물 바쳐 신하 된 직분 다하리     

(16)

爾來一百十餘年 근래에 백 십여 년이 동안

嬴得王家德化宣 왕가의 덕화를 가득히 받으니

文物儘從周禮樂 문물은 모두 주나라 예악을 따랐고

版圖編入禹山川 판도가 우임금의 산천이 되었네     

(17)

我今萬里擎丹詔 내가 지금 만 리 길에 임금의 조서를 받들고

跋涉遠來並海徼 물 건너 멀리서 와서 바닷가에 닿았네.

又有同舟許使君 또 허 목사와 배를 함께 타니

一番傾盖膽相照 한번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통했네     

(18)

舘頭岩畔卸征鞍 관두량 바위 밑에 말안장 내려놓고

海色天光入望寒 바다 색 하늘 빛을 바라보니 쓸쓸하네

貫月槎浮縱所適 불 밝힌 배 띄워 갈 곳으로 놓아주니

南溟無際學鵬搏 끝이 없는 남쪽 바다를 붕새가 날듯이 가네.     

(19)

孤帆却被天風好 돛단배가 순풍을 받아 좋으니

驀地飛經火脫島 날듯이 화탈도를 지났네

暫試靑蛇掣海雲 잠시 푸른 뱀이 바다 구름을 끌어오니

蜃樓蛟室紛顚倒 신루와 교실이 어지러이 뒤엉켰네.     

(20)

底處一聲送櫓歌 어디선가 뱃노래 소리 들려오니

迓船來趂疾於梭 마중 나온 배는 (베틀의) 북처럼 빠르게 다가오네

蓬窓揭了問前程 봉창〔배의 창문〕을 걷어 올려 앞길을 물어보니

舘在朝天影蘸波 조천관의 그림자가 파도에 잠겨 어른거린다 하네     

(21)

海吐瑞山供逸趣 바다가 토해 낸 서산(瑞山)에는 뛰어난 흥취가 배어 있고

龍蟠牛島呈祥霧 용이 웅크린 듯한 우도에는 상서로운 안개 드리웠네

山川喜我泛槎來 산천은 내가 탄 배가 오는 것을 반기니

我亦有情堪指顧 나 또한 정겹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돌아보네     

(22)

燕尾蜂腰千萬形 제비 꼬리처럼 갈라지고 벌의 허리처럼 잘록하여 천 가지 만 가지 형상인데

爭流競秀不知名 수많은 화려한 산과 계곡 그 이름을 알 수 없지만

微茫樹色畵圖裏 아득한 나무숲은 그림 속에 있는 듯하고

日暈紅霞照眼明 해가 붉은 노을에 어리니 눈부시네     

(23)

遠人頗識尊王命 먼 지방〔제주〕 사람들이지만 왕명의 존엄함을 잘 알아

扶我登途笳鼓競 나를 부축하여 길에 오르니 피리 북소리 요란하네

浦口巉嵓道士羊 포구의 울뚝불뚝한 바위는 도사양(道士羊)인 듯하고

路周磊落仙人鏡 길가의 돌탑〔방사탑〕은 신선무늬 거울처럼 보이네     

(24)

靑鳥彩鸞如有期 청조와 채란〔관기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護予呵擁城中馳 나를 에워싸고 ‘물렀거라’며 성안으로 달려가네

奔迎拜跪稍知禮 달려와 맞이하고 절하고 꿇어앉으니 자못 예를 아는 것 같은데

聒耳語音譯後知 떠들썩한 말소리를 통역을 해야 알아듣겠네     

(25)

便從父老問風土 문득 어른에게 풍토〔자연환경〕에 대해 여쭈니

冬苦風威夏苦雨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에 여름에는 비에 괴롭고

草木昆虫傲雪霜 초목과 벌레들은 눈서리를 버텨내고

禽無鵂鵲獸無虎 날짐승은 부엉이와 까치가 없고 들짐승은 호랑이가 없다고 하네     

(26)

人知種植飽齁齁 사람들이 농사지을 줄 알아 배불리 먹고 자니

不羨江陵千戶侯 강릉의 천호후가 부럽지 않네

渾把生涯登壽域 온전한 인생살이는 태평성대에 이르니

閭閻到處杖皆鳩 마을마다 이르는 곳엔 모두 늙은이로다     

(27)

嫌將歲月虛抛擲 가는 결실의 달〔歲月, 음력 8월〕 헛되이 보내기 아까워

照里鞦韆傳自昔 조리놀이〔줄다리기〕와 그네타기 옛날부터 전해왔네

僧刹了無香火時 향불 피울 절간도 없는데 

騈闐簫鼓燃燈夕 연등제 저녁에 북소리 퉁소소리 요란하네     

(28)

革帶芒鞋葛織衣 가죽띠를 매고 집신 신고 갈포옷을 입네

石田茅屋矮紫扉 돌밭에 초가집의 사립문은 나지막하네

負甁村婦汲泉去 허벅 진 촌 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

橫笛堤兒牧馬歸 젓대 불며 둑에 있던 아이 말을 몰아 돌아오네     

(29)

民風淳儉看來取 백성의 풍속이 순박하고 검소하니 본받을 만 하고

不必彎絃徒尙武 활시위 당기며 무예를 숭상할 필요 없으니

絃誦東西精舍中 동서 학당에서 글 읽는 소리 끊기지 않고

元來人傑擬鄒魯 본디 뛰어난 인재는 공맹을 닮는다네.     

(30)

路入杏壇謁素王 길에 접어들어 행단에서 공자님 뵙고

靑衿揖我明倫堂 유생들이 명륜당에서 내게 허리를 굽혀 절하네

誰知萬里滄溟外 누가 알았으랴 머나먼 바다 밖에

有此衣冠禮義鄕 의관이 단정하고 예의 바른 고장이 있을 줄을     

(31)

更誇物産荊揚府 물산은 형주(荊州)⋅양주(楊州)보다 자랑스러워

珍寶精華那可數 진귀한 보물과 알짜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네

玳瑁蠙珠貝與螺 거북껍질, 진주, 조개와 소라

靑皮白蠟石鍾乳 푸른 귤껍질, 백랍, 석종유     

(32)

乃知仙藥百千般 비로소 백천 가지 선약이 있는 줄 알았으니

箇裡分明有煉丹 그 속에 분명 연단도 있겠지

收拾鐺中九轉後 솥에 모아 넣고 구일 밤낮 (가열하며) 굴린 후에

定應白日可飛翰 (먹으면) 응당 대낮에도 높이 날 수 있다지     

(33)

我來得到神仙宅 신선이 사는 섬에 왔으니 

採了天台劉阮藥 천태산 유신(劉晨)과 완조(阮肇)처럼 선약을 캐며

願學麻姑看海桑 마고선녀가 상전벽해를 본 일을 배우려 한다면

應將此身壺中托 이 몸을 응당 선경(仙境)에 의탁해야 하겠지만      

(34)

紫殿九重憶聖君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을 생각하고

白雲千里戀雙親 하얀 구름 천 리 밖에 어버이를 그리네

此身猶未全忠孝 이 몸은 아직도 충효를 다하지 못했으니

不忍堪爲方外人 속세를 초탈한 사람이 될 수 없다네     

(35)

豈獨瀛洲在此地 영주〔한라산 같이 좋은 곳〕가 어찌 이곳에 있을 뿐이겠는가

求之人世不難致 구하기로 한다면 인간 세상 어디든지 있겠지만

莫如還向華山陽 화산〔북한산〕 남쪽〔한양〕으로 돌아감만 못하리니

保我平生伊尹志 평생 이윤의 뜻〔王道政治〕을 지키며 살겠네  

   

「탐라시삼십오절(羅詩三十五絶)」의 내용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절에서 (5)절까지는 제주의 지리와 명소를, (6)절에서 (16)절까지는 제주의 역사를, (17)절에서 (24)절까지는 최부의 여정을, (25)절에서 (31)절까지는 제주의 풍속과 물산을, (32)과 (33)절은 제주의 도교적 신비를, (34)절과 (35)절은 최부의 다짐을 노래하고 있다. 「탐라시삼십오절(羅詩三十五絶)」을 읽고 나니 제주를 소개하는 한 편의 장대한 영화를 본 듯한 감동이 밀려온다. 최부의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묘사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 참고 문헌     


∎ 『崔溥 漂海錄 譯註』, 최부 지음, 박원호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 「금남선생 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 『미암집』 제3권, 기(記), 柳希春

∎ 『鶴山樵談』, 許筠

∎ 『國朝詩刪』, 許筠

∎ 『寄齋雜記』, 「歷朝舊聞」, 朴東亮

∎ 『己卯錄續集』, 「禍媒」, 金堉

∎ 『남사록』, 김상헌, 김희동 역, 영희문화사, 1992

∎ 『탐라시선』, 오문복 역, 이화문화사, 2006

∎ 『남사일록』, 이증, 김익수 역, 제주문화원, 2001

∎ 『탐라지』, 이원진, 양중해 역, 제주대학교탐라문화연구소, 1991

∎ 『역주 탐라지』, 이원진, 김찬흡 역, 푸른역사, 2002

∎ 임준성, 「錦南 崔溥의 耽羅詩 三十五絶 硏究」, 『古詩歌硏究』, 第27輯, 한국시가문화학회, 2011

∎ 윤치부, 「최부 <탐라시>의 번역 양상 고찰」, 『겨레어문학』, Vol. 46, 겨레어문학회, 2011

∎ 윤치부, 「최부 <탐라시>의 이본 고찰」, 『새국어교육』, Vol. 86, 한국국어교육학회, 2010

∎ 「全羅道」, 『新增東國輿地勝覽』, 한국고전번역원 옮김(https://db.itkc.or.kr/)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사편찬위원회 옮김(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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