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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Aug 09. 2021

정의현감(旌義縣監) 이섬(李暹)의 표류(漂流)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이야기 (1)


시작하며

    

성종 대에 최부보다 5년 전 중국에 표류하였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제주도 정의현감 이섬이다. 본 장에서는 『성종실록(成宗實錄)』에 기록된 이섬의 표류에 대해 정리한 다음 최부가 이섬을 『표해록』에 어떻게 기술되었는지 알아보자. 또한 이섬의 표류가 『표해록』의 작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섬의 표류   

  

정의현감 이섬의 표류는 『성종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종 14년(1483년) 2월 29일에 이섬이 정의현감으로 있다가 벼슬이 갈려 제주를 떠나 새로운 부임지로 향했다. 배에는 이섬과 정의훈도(旌義訓導) 김효반(金孝胖) 등 47명이 타고 있었다. 추자도 부근에서 악천후를 만나 가운데 돛대와 노가 파손되었고 배에 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은 선실에서 목을 매었다. 김효반도 목을 매자 이섬이 ‘만약 물을 퍼내어 버리고 배를 조정한다면 살아날 도리가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목을 풀고 배를 구출하지 않는다면 나도 또한 죽을 것이다.’라며 목을 맸고 이섬의 첩도 두 아이를 안고 따라 목을 매었다. 읍리(邑吏) 한진(韓進)이 ‘배안에 있는 물은 밑바닥에서부터 새어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밖으로부터 밀려서 들어온 것이므로 만약 인사(人事)를 다한다면 구(救)할 수가 있을 것이니, 원컨대 관인(官人)께서 죽지를 마소서.’라고 간청한 뒤 이섬과 김효반 등 여러 사람의 목맨 것을 풀어주었다.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물을 퍼내고 나무로 노(櫓)를 삼아 저어 가서 파선을 피할 수 있었으나 배고픔과 갈증으로 14명이 죽었다. 표류한지 10만에 섬과 김효반 등 33명은 중국(中國) 장사진(長沙鎭)에 표착했다. 

이섬 등 33인은 천호(千戶) 상개(桑鎧)가 이끄는 병졸들에 의해 끌려갔다. 순검관(巡檢官) 섭총(聶摠)이 이섬에게 국경을 침범했다고 추궁하자 이섬은 사실대로 써서 대답했다. 이틀 후 굴항지휘소(掘港持揮所)에 끌려간 이섬에게 상개 등이 ‘성화(成化) 19년 3월 일에 공장(供狀)을 쓴 사람 이섬이 동년 성화 19년 3월 초9일에 쌍의(雙桅)840) 의 대선(大船)을 타고 궁전(弓箭)에 요도(腰刀)를 차고 중국(中國)의 경계에 침입해 왔으니, 이 공술(供述)이 적실(的實)한 것이다.’라는 공장(供狀)을 들이밀었다. 이섬은 ‘이섬은 조선국(朝鮮國) 정의 현감(旌義縣監)으로 체임(遞任)되어 경성으로 돌아가던 중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중국에 오게 된 것을 만만 천행(萬萬天幸)으로 여기는데, 어찌 경계(境界)를 침입해 왔겠습니까? 한갓 입으로 차마 말 못할 일일 뿐만 아니라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섬이 비록 백인(白刃)에 죽는다 해도 속여서 공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써서 항변했다. 그러자 이졸(吏卒)이 이섬에게 공장(供狀)에 서명(署名)하도록 강제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소주(蘇州)에서 온 총병관(摠兵官) 곽총(郭銃)이 이섬에게 ‘네가 계로(係虜)된 것을 숨기지 말고 전형(典刑)에 걸리게 된 것부터 명확하게 써라.’하자, ‘이섬은 조선(朝鮮)의 정의 현감(旌義縣監)으로 체임(遞任)되어 경성으로 돌아가던 중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밤낮 20일을 떠다니다가 다행히도 중국의 경토(境土)에 이르러 오늘까지 목숨을 잇고 있는데, 어찌 감히 숨기는 일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조선국(朝鮮國)의 믿을 만한 일로 진달하겠습니다. 성화(成化) 15년 윤12월, 우리 나라에서 중국의 조서(詔書)를 받들어 여진(女眞)을 북벌할 때, 이섬도 또한 예군관(預軍官)으로 12월에 적경(賊境) 깊이 들어가 수급(首級)을 베어서 돌아왔으며 중국에 포로[俘]를 바쳤습니다. 16년 경자년(庚子年)과 17년 신축년(辛丑年)에 중국 사신이 연(連)하여 본국(本國)에 들어오니, 본국에서는 세자(世子)의 고명(誥命)을 청한 일이 있었고, 우리 나라 사신도 또한 중국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고했다. 이에 총병관(摠兵官)이 글로서 보이기를, ‘너희 나라는 조정(朝廷)을 경봉(敬奉)하여 신하로서의 직분을 두루 다하였기에 너희를 우례(優禮)하여 대우하지만, 만일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면 바로 죽였을 것이다.’라며 사람을 시켜 이섬 등의 항쇄(項鎖)와 수박(手縛)을 풀어주도록 하였다. 이섬(李暹) 등이 재배(再拜)하니, 총병관도 또한 답배(答拜)하였다.

이틀 후 양주(楊州)에 도착하자, 지휘 첨사(持揮僉事) 유윤(劉胤) 등이 ‘너희 임금은 어떤 것으로 정치를 하며, 무엇으로 양민(養民)하는가? 또 관리가 된 자는 어떤 일을 행하며, 조사복(朝士服)·공상복(工商服), 유자(儒子)의 관복(冠服), 승인(僧人)·도사(道士)의 복(服) 등을 명확하게 써라.’라고 물으니 이섬이 ‘우리 전하께서는 인의(仁義)로써 정치를 하시고, 농상(農桑)으로써 양민(養民)하시며, 관리가 된 자는 형벌(刑罰)을 덜고 상법(上法)을 준수하며 부렴(賦斂)을 박(薄)하게 함으로써 민생(民生)을 후하게 합니다. 임금을 섬기되 충(忠)으로써 하고, 어버이를 섬기되 효(孝)로써 하며, 형장(兄長)을 섬기되 경(敬)으로써 하고, 붕우(朋友)를 접하되 신(信)으로써 합니다. 조복(朝服)·공상(工商)의 복(服)은 제도가 중국과 같고, 유자(儒子)의 관복(冠服), 승인(僧人)의 복(服)도 또한 중국과 다름이 없으나, 다만 도사(道士)만은 본국(本國)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너희 나라에 문무(文武)에 탁이(卓異)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며, 너와 같은 무리가 몇이나 되는가?’라고 묻자, 이섬은 ‘문무를 탁이(卓異)한 자로 현재 조정에 있는 이는 1천 인이나 되며, 나와 같은 무리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배가 양주(楊州)를 떠날 때 함께 탄 사사원(謝士元)이 이섬에게 시(詩)를 요구하였다. 이에 이섬이

      

江南勝地是楊州 강남(江南)의 명승지는 바로 양주(楊州) 땅

靑雀黃龍戴書樓 청작(靑雀)·황룡(黃龍)이 서루(書樓)에 그려져 있네

叩枻張帆浮碧水 노를 잡아 돛을 펴고 푸른 물에 떠가니

暮天涼月逐人流 저문 날 쓸쓸한 달이 사람 따라 흐르네 

    

라 하니, 사사원(謝士元)이 이 시에 차운(次韻)하여  

    

天風吹送到中州 바람결을 타고서 중주(中州)에 이르니

快覩龍顔五鳳樓 용안(龍顔)·오봉루(五鳳樓)가 환히 보이네

千載遠封箕子國 천년의 역사 지닌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나라

至今人物重儒流 지금도 인물들이 유학(儒學)을 중히 여기네  

   

라 하였다.

이섬과 김효반 등 33인은 중국 관원의 호송을 받아 북경(北京)에 도착하였다. 중국 조정에서는 때마침 북경에 와있던 천추사(千秋使) 박건(朴楗)으로 하여금 데리고 귀국하도록 하였다. 

     

2. 이섬의 귀국과 특진

     

이섬 등이 천추사를 따라서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은 성종은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사은사로는 파능군(坡陵君) 윤보(尹甫)를 사신으로 삼고 박옹(朴壅)을 부사(副使)로 삼도록 하였다.

8월 12일에 6개월여 만에 천추사를 따라 돌아온 이섬에게 성종은 표류(漂流)하였던 일을 묻는다. 이섬이 겪었던 일을 차례로 고해 올리니, 성종은 “네가 만약 글을 해득하지 못하였더라면 어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며 뒤에 다시 아뢰라고 명하였다. 당일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김종직(金宗直)이 이섬의 행록(行錄)을 따라 다시 그의 말을 뽑아서 글로 아뢰었다. 성종은 이섬의 관직을 다섯 자급(資級)을 올리는 상을 내렸다.

9월 6일에 참찬관(參贊官) 김종직(金宗直)은 성종에게 이섬의 「행록(行錄)」을 편찬하였다고 아뢴 후 이섬을 수행한 훈도 김효반과 이섬 등의 자살을 막은 호장(戶長) 한진에게도 포상하기를 주청한다. 이에 성종은 상을 내린다.   

  

3. 특진 반대 상소와 성종의 대응 

    

성종이 이섬에게 다섯 자급을 올리는 상을 내리자 상소가 빗발친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종윤(李從允),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양면(楊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녹숭(李祿崇),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박계성(朴繼姓) 등이 ‘군공(軍功)이 1등인 자라 하더라도 세 자급을 올리는데, 이섬은 단지 표류하다가 살아서 돌아온 것뿐이며, 나라를 위해 수고한 공이 없다’며 이섬에 대한 포상이 옳지 못하다고 상소한다.

성종은 “이섬은 다른 나라 지경에 표류(漂流)하여, 능히 기회에 따라 변(變)에 응하여 그 죽음을 면했고, 중국 조정 사람과 시(詩)를 서로 창화(唱和)하였다. 그 시가 비록 일컬을 만한 것이 못되나, 이름이 무신(武臣)이면서 언론과 글이 이와 같으니, 가히 나라를 빛낸 신하(華國之臣)라고 이를 만하다. 또 영접 도감 낭관의 승직(陞職)과 가자(加資)는 이미 중국 사신에게 말하였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라고 한다. 또한  성종은 처음에는 이섬을 당상관에 올리려 했다가 다섯 자급을 올리는데 그친 것이라며 가납하지 않는다.

                         


『성종실록』에는 1483년에 종6품의 현감에서 다섯 자급을 올리는 상직을 받은 이섬이 1484년에 종3품의 평안도 만포 첨절제사(滿浦僉節制使)를 지냈고 1487년에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을 지낸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성종(成宗) 때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이섬(李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보(崔溥)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揚州府) 굴항채(崛港寨)에 닿으니, 채관(寨官)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布帆十幅不遮風)’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섬(暹)은 무인(武人)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記事)가 없어 애석하다.


- 성소부부고 제26권 / 부록 1 ○ 학산초담(鶴山樵談)


허균이 기록은 최부의 『표해록』에 나오는 부분과 유사하다. 『표해록』은 최부의 외손자인 유희춘에 의해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허균이 읽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이섬의 「행록(行錄)」은 전란(戰亂)이나 관리 소홀로 소실(消失)되었고 『성종실록』과 관련된 자료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기 때문에 허균이 접할 수 있는 기록에 한계가 있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4. 최부의 표류와 『표해록』 저술 

    

최부는 성종 13년(1482년) 29세에 알성문과(謁聖文科) 을과(乙科)에 1등으로 합격한다. 성종 14년(1483년) 30세에 정8품 교서관 저작(校書館 著作)을 시작으로 군자감 주부,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과 부교리, 용양위 사과와 부사직을 거쳐 제주3읍추쇄경차관에 임명되니 이때가 성종 18년(1487년) 최부의 나이 34세이다.

성종 18년(1488년) 정월 30일에 최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상을 치르기 위해 윤 정월 3일 수행 관리, 노비, 곁군, 호송군으로 이루어진 42인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으로 가던 중 중국 절강성에 표류한다. 악천후를 겪고, 해적을 만나고, 왜구로 오인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긴다. 중국 관리들로부터 조선에서 표류해온 사실을 인정받은 후 호송을 받으며 항주와 북경을 거쳐 6월 4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이른다. 6월 14일 한양의 청파역에 도착한 최부에게 성종은 일기(日記)를 지어 올리도록 명한다. 이에 최부가 장장 6개월간의 견문기인 「중조문견일기(中朝聞見日記)」를 성종에게 바친다. 『표해록』은 뒤에 최부의 문견일기의 활자본에 붙인 이름으로 최부의 외손자 유희춘 등에 의해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5. 『표해록』 중의 이섬     


『표해록』에서 이섬은 다섯 편의 일기에 등장한다. 

    

제주에서 출항하자마자 사람들이 고르지 못한 날씨를 걱정하자 진무 안의는 “이 바다를 건넌 사람으로서 민간의 배가 뒤집혀 침몰되는 일은 잇달아 일어났지만, 왕명을 받든 조신으로서는 오직 전 정의현감 이섬 외에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된 적이 드물었던 것은, 모두 임금의 덕이 지극히 높음을 실제로 하늘이 알기 때문입니다.”라며 항해를 계속하도록 명했다. (윤정월 3일의 일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자 사람들은 최부가 출항 전에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그러자 관노 권송이 “그렇지 않다. 이에 앞서 정의현감 이섬은 3일 동안 재계한 뒤 광양 등의 신령님께 정성껏 제자를 지냈는데도, 표류되어 거의 죽을 뻔하다 다시 살아났다. 경차관 권경우는 아무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왕래가 아주 순조로웠고 아무 탈도 없었다. 결국 바다를 건너는 데 그 안전한가 아니한가는 순풍을 기다리는 여부에 달려 있지, 어찌 신령님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말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최부를 두둔했다. (윤정월 14일의 일기)  

   

신은 또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를 들어 묻기를, “여기서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입니다.” “남경과는 몇 리나 됩니까?” “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윤정월21일의 일기)  

   

중국 양주에 도착했을 때 양주위백호 조감이 6년 전 이섬이 표류해온 일을 최부에게 이야기했다. 조감이 ‘이섬이 고향이 멀다고 근심했다’고 언급하자 최부는 “이섬은 단순히 길이 멀다고 근심했지만, 내가 괴로운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염습도 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늙어 살아 계시지만 자식의 직분을 못했으며, 나그네의 길은 멀기만 하니, 비통한 마음은 천지가 캄캄할 정도입니다.”라고 한탄한다. (2월 23일 일기)   

  

북경에서 최부가 명나라 황제의 은혜에 사례한 후 대궐에서 옥하관으로 돌아온 최부에게 사람들이 하사받은 옷을 가지고 “전에 정의 사람이 현감 이섬을 따라나섰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는 황제께서 상을 내려주시는 은혜가 없었는데, 지금 우리들은 행차를 따라왔다가 특별히 이런 뜻밖의 상을 받고 황제의 앞에서 절을 하게 되었으니 행운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최부는 “황제께서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상을 내리시는 것은 모두가 우리 임금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여 사대하신 덕택이지 너희들이 스스로 가져온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지금 우리 임금의 덕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며 성종의 은덕을 칭송했다. (4월 20일 일기)

     

『표해록』에 기술된 이섬의 모습을 살펴볼 때 이섬에 대한 최부의 생각은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최부는 윤정월 3일의 일기에서 왕명을 받든 조신을 태운 배 중 오직 이섬이 탄 배만이 표류했음을 부각했다. 윤정월 14일의 일기에서는 출항 전에 이섬이 신령님께 제사를 지냈지만 표류하게 되었음을 비꼬았다. 윤정월 14일의 일기에서 최부는 자신이 이섬보다 더 멀리 표류해왔음을, 2월 23일 일기에서는 이섬의 근심에 비해 상을 당한 자신의 괴로움이 더 컸음을 드러냈다. 4월 20일 일기에서 최부는 자신만이 중국 황제로부터 상을 받고 사은했음을 과시했다.

최부는 이섬이 표류한 해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에 대해 최부가 관심을 갖지 않았을 리 없다. 젊은 관료였던 최부도 이섬의 특진이 부당함을 상소했던 관료들과 같은 생각을 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최부는 스승인 김종직이 감싸고도는 이섬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웠으리라 판단된다. 대신 최부는 『표해록』에서 이섬에 대한 비판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최부는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김종직의 문인인 김굉필(金宏弼), 송석충(宋碩忠), 박담손(朴聃孫), 신희연(申希演) 등과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를 만들었다. 1486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스승 김종직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교정을 함께 완료하였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 삼아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화를 입었다. 유희춘은 「금남선생 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무오년(1498) 7월에 사화(史禍)가 일어났다. 공과 신종호(申從濩) 등 8인은 일찍이 제술에서 점필재(佔畢齋)에게서 과차(科次)를 받았기에 연산이 명하여 그 집들을 수색하게 하니 오직 공의 집에서만 점필재 문집이 나옴으로써 엄중한 고문을 받고 이윽고 형장을 때린 다음,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었다.


6년 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라는 연산군의 명령에 참형을 당했다.

최부에게 김종직은 스승과 제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6. 이섬의 표류가 『표해록』의 작성에 미친 영향   

  

5년 후에 이섬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최부에게 이섬의 표류는 간접 학습효과로 작용했다. 최부는 『표해록』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신이 두루 돌아 본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상중의 몸이라 감히 유람하며 구경하거나 빼어난 경치를 찾아보지 못하였고, 단지 배리 4인으로 하여금 날마다 표방을 보고 지역을 묻도록 했으나, 하나를 건지면 만(萬)을 흘린 셈이므로 그 대략만을 기록할 따름입니다.  

     

최부는 자신의 표류를 기회로 보았고, 배리 4인(광주목리 정보, 화순현리 김중, 나주목리 손효자, 제주목리 이효지) 시켜 조사하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최부는 수행하는 중국 관리에게 물어 기록하거나 관련 문서와 비문, 공문 등을 베꼈다. 최부는 성종이 이섬의 표류에서 했던 바를 자신에게도 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꼼꼼하게 준비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교정에 참여한 최부는 이섬의 「행록(行錄)」이 필적할 수 없는 일기(日記)를 엮기로 작심하였으리라.   


최부는 표류를 시작해 귀국할 때까지 보고 들은 일을 세 권의 일기로 찬술하여 바쳤다. 각 권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성종 19년 윤정월 3일에서 2월 4일까지의 일기이다. 최부가 제주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현지에 부임하게 된 경위, 부친상을 당해 성종 19년 윤정월 3일 출항 후 표류 과정, 중국 절동(浙東)지역에 상륙 후 소흥부에 이르러 왜구의 혐의를 완전히 벗는 내용이다. 사지(死地)를 헤매는 상황에서도 왕희지의 수계처인 난정 등 절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록을 빠트리지 않았다. 

제2권은 2월 5일 절강성의 수도 항주에서 출발하여 3월 25일 천진위를 지날 때까지의 일기이다. 지휘 양왕과 천호 부영 등의 호송을 받아 항주를 출발하여 가흥, 소주, 무삭, 상주를 거쳐 진강을 지나 양자강을 건넜다. 양주부에서 이섬의 표류에 대해 듣고 회안을 지나 회하(황하)를 건너고, 서주, 패현, 연주, 제녕주, 덕주 등지를 경유해 천진위에 도착한다. 의천 대각국사와 인연이 있는 고려사, 『황화집』, 항주의 문화와 시정, 한산사시와 호구탑, 고려정, 호남과 복건 등지의 번성함, 운하의 개착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적었다.

제3권은 3월 26일 천진위를 지나 북경의 옥하관에 도착하여 약 25일간 머무르며 황제에 사은하고, 북경을 떠나 요동반도를 거쳐 6월 4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하기 까지의 일기이다. 옥하관에서 유구의 사행, 국자감생들을 만났고 백호 장술조 등의 호송을 받으며 귀국하던 중 옥전역에서 돌아오는 명나라 사신과 광녕역에서 조선의 성절사 일행을 만났다. 한나라 명장 이광의 고사, 백이 숙제 이야기, 요동 지역의 역사 등에 대해서 꼼꼼한 기록을 남겼다. 약 6개월 동안의 견문기를 끝낸 다음, 강남과 강북으로 구분하여 산천과 교량, 운하의 제방, 수문과 체운소, 풍속 등을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표해록』은 단순히 겪은 사건을 기술한 책이 아니라 표착한 중국 절강성 영파부에서 항주, 북경에 이르는 운하 수로와 북경에서 요동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육로에 대한 지리와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지리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풍속, 수차의 제작법 등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해박한 중국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실제 견문한 바를 종합한 그의 기술은 현장감이 넘친다.


5월 23일 일기에서 병난 최부에게 호송 관리 장술조는 3일 후에 출발하기를 권했다. 이에 최부는 “나는 초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다가 표류하여 타국에 머무르고 있으니, 사정이 매우 절박하여 하루를 지내는 것이 마치 3년 같습니다. 어제의 병이 오늘은 조금 나았으므로 수레 위에 누우면 갈 수 있으니 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귀국하여 초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출발 일정을 미룰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6월 14일에 한양에 도착한 최부에게 성종이 일기를 엮으라고 명하자 최부는 상을 치르러 나주로 내려가지 않고 4월 22일에 일기를 찬진(撰進)한다. 이를 두고 사신(史臣)은 “최부(崔溥)가 만약 이때에 사례(謝禮)하고, 상(喪)을 당하여 어미를 보고 난 후에 일기(日記)를 찬집(撰集)하겠다고 하였다면, 임금이 반드시 따르셨을 것이고 사람들도 끼어들어 말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훗날의 의논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자신에게 누가 되게 한 것은 지나친 것이다.”라 논평했다.

목숨이 위태한 상황에서도 상례(喪禮)를 지켰고, 중국의 황제에게 사은하는 행사에도 상복을 벗기를 완강히 거부했던 최부가 어머니를 먼저 찾아뵈어야 마땅한 도리를 몰랐을 리 없다. 이러한 최부의 처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섬의 선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종직은 성종이 귀국한 이섬을 인견한지 14일 후에 이섬의 「행록(行錄)」을 지어 바친다. 최부는 그보다 짧은 8일 만에 훨씬 방대하고 상세한 일기를 완성한다. 최부에게 청출어람(靑出於藍)에 대한 희구(希求)가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헤아려본다. 

    

마치며  

   

지금까지 『성종실록』에 기록된 이섬의 표류에 대해 정리한 후 『표해록』에 기술된 이섬의 모습과 이섬의 표류가 『표해록』의 작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섬의 표류는 최부에게 ‘앞서간 발자국’이었다. 최부가 이섬과 동시대의 사람이고 비슷한 사건을 겪었기에 이섬의 표류가 『표해록』의 작성에 영향을 미쳤음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만일 이섬의 표류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의 『표해록』과는 많이 다른 ‘표해록’을 읽고 있지 않을까.  


에필로그


1488년 6월 22일 최부는 성종에게 『표해록』을 지어 바치고 나주로 분상(奔喪)했다. 성종은 최부에게 베〔布〕 50필을 하사했고 3일 후 전라도 관찰사에게 최부와 함께 표류한 42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표류할 때 배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허상리(許尙理) 등 18인에게 각각 면포(綿布) 2필과 정포(正布) 2필씩을 지급하도록 하서(下書)했다. 또한 최부에게 튼튼한 배를 구해서 준 제주 목사(濟州牧使) 허희(許熙)에게도 상을 내렸다.

최부가 부친상에 이어 모친상을 치르고 나자 성종은 1491년 11월 22일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사간원에서는 최부가 귀국하여 바로 빈소(殯所)로 내려가지 않고 일기〔『표해록』〕를 지어 명교(名敎)에 어긋났다 하여 서경(署經, 직책을 맡는 데 하자가 없다는 동의서)하지 않았다. 1492년 1월 5일 최부는 성종에게 피혐(避嫌,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음)을 청했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양면(楊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계맹(李繼孟)이 연이어 불가함을 고(告)하자 1월 9일에 최부를 사헌부 지평에서 해임했다. 이때 최부의 스승 김종직은 병으로 낙향 중이었고 같은 해 8월 19일에 졸(卒)하였다.

성종은 같은 달 14일에 최부를 인견하고, 표류(漂流)할 때의 일을 물어 들은 후 유의(襦衣) 및 가죽신을 내렸다. 성종은 “최부가 사지(死地)를 밟아 헤치고 다니면서도 능히 나라를 빛냈기 때문에 주노라(溥跋涉死地, 亦能華國).”라며 최부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다.

최부가 1493년 4월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자 4월 11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이종준(李宗準)이 성종에게 부당함을 아뢰었다. 이에 성종이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자문한 후 ‘왕명으로 일기〔『표해록』〕를 찬술하였으므로 용서할 만하다’ 하였다. 하지만 4월 13일에 지평(持平) 윤장(尹璋)이 성종에게 최부가 초상(初喪) 중에 ‘친구〔朋友〕들과 태연 자약(泰然自若)하게 대화(對話)’를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아뢰었다. 성종이 친구 접대는 잘못이라며 최부의 교리 직을 갈려 하자 14월 17일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송질(宋軼)이 ‘최부가 요청(邀請)하여 담화(談話)한 것이 아니고 벗들이 스스로 가서 조문한 것이므로, 최부가 사절(謝絶)하지 못한 것’이라며 중론(衆論)을 채택하기를 성종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4월 18일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세좌(李世佐) 등이 ‘선비들이 교결(交結)하여 서로 구원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다’라고 성종에게 아뢰며 들고일어났다. 4월 19일에 대사헌 이세좌 등이 다시 최부와 최부를 옹호한 자에 대해 문제 삼자 성종은 조정(朝政)의 의견을 들은 후 “경(卿) 등이 홍문관에서 먼저 주창한 자를 국문(鞫問)하고자 하였으나, 또한 공의(公議)를 따라서 한 것이니, 추문(推問)할 수가 없다. 지난번에 대간들이 최부가 붕우를 접대한 것을 가지고 옳지 못하다고 했기 때문에, 이미 체직(遞職)하도록 하였으나, 지금 군의(群議)가 이와 같으니, 뒷날 마땅히 통용(通用)하겠다.”라며 논란을 매듭짓는다.

성종은 1493년 5월에 최부를 승문원 교리(承文院敎理)로 환차(換差)하였고 1494년 1월 홍문관 교리로 다시 임명하였고 8월에는 부응교 겸 예문응교(副應敎兼藝文應敎)로 승차시켰다. 1494년 12월 24일 성종이 훙(薨)하였다.

   

▣ 참고 문헌 

    

∎ 『崔溥 漂海錄 譯註』, 최부 지음, 박원호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 『표해록』, 최부 지음, 서인범·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5

∎ 「금남선생 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 『미암집』 제3권, 기(記)

∎ 『성종실록(成宗實錄)』, 157권, 국사편찬위원회 옮김(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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