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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Aug 24. 2021

조선의 최교리를 보내며〔送朝鮮崔校理序〕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이야기 (3)


윤정월 3일 제주를 떠난 최부는 13일을 표류한 끝에 16일에 중국 영파부(寧波府) 우두(牛頭) 앞 바다에 표착했다. 17일 배를 버리고 상륙한 최부는 왜구로 오인을 받아 죽을 고생을 하며 천호(千戶) 허청(許淸)에게 끌려 19일에 도저소(桃渚所)에 도착했다. 사흘간 심문을 받은 최부는 23일 중국 관원들의 호송을 받으며 도저소를 출발하여 다음날 건도소(健跳所)에 도착했다.


이때 최부를 찾은 이가 명나라 사람 ‘장보(張輔)’이다. 장보는 1486년 병오년(丙午年)에 실시한 향시(鄕試)에서 7등으로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최부는 윤정월 23일 일기에 장보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떤 사람이 병오년에 등과한 소록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과거에 합격한 방록(榜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방록 가운데 ‘장보’란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 이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당신 나라에서도 등과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제도는 초야에 있던 선비로서 등과한 사람은 모두 관청에서 봉록을 주고 문가에 정문을 세워주며, 명함에도 무슨 과 몇 등으로 진사급제한 자 등이라고 써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을 이끌고 자기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 앞의 네거리에 과연 용을 아로새긴 석주로 2층 3간의 문을 만들었는데, 노란빛과 푸른빛이 눈이 부시도록 빛났고, 그 위에는 ‘병오과 장보의 가〔丙午科張輔之家〕’라는 글씨가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장보는 자기의 등과를 신에게 과시한 것입니다. 신 또한 떠벌리는 말로 그에게 자랑하며 말하기를, “나는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여 해마다 쌀 200석을 받았고 정문이 3층이나 되니 족하가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신은 “나의 정문은 먼 곳에 있으니 보일 수 없지만, 내게 문과 중시의 소록이 있습니다”라고 하고 펼쳐 보였습니다. 장보는 소록 속에 신의 관직과 성명이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으며 말하기를, “내가 미치지 못하는 듯합니다〔我殆不及矣〕”라고 하였습니다. 

    

최부가 건도소를 떠난 후 장보는 「조선의 최교리를 보내며〔送朝鮮崔校理序〕」라는 글을 남겼다. 이글은 『영해현지(寧海縣志)』 권10, 예문(藝文)에 실려 있으며 전문(全文)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최교리를 보내며」 장보(자는 방좌, 영해인(寧海人))     

조선의 홍문관부교리 최주 연연은 왕명으로 본국의 제주도에서 호구를 조사하였다. 얼마 후 부친상을 당하여 큰 배를 타고 바닷길로 돌아가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우리 건도소에 오게 되었다. 변경을 지키는 소사(小使)가 가서 심문하니 사정을 말하므로 드디어 그가 데려온 이졸(吏卒) 43인을 맞이하여 공소(公所)에서 묵게 하였고, 장차 번부(藩部)로 보내 경사(京師)에 이르게 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지방의 공직을 맡은 자제(子弟)가 청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조선은 옛날의 고려입니다. 기자의 유풍이 남겨진 곳으로서 우리의 동쪽 울타리가 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예와 의를 잘 지키는 자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가서 살펴보니 그의 행동거지는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으며 목소리와 얼굴은 비통에 잠겨 있었는데, 환난(患難)을 마음속에 새기지 않고 능히 상례(喪禮)를 지키는 것이 더욱 존경스러웠다. 내가 고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이번 행차는 이른바 ‘아침에 잃어버렸다가 저녁에 찾는다〔失之東隅, 收之桑楡〕’는 것이겠지요! 비록 풍랑 속에서 돛과 노를 잃어 간담이 떨어져 스스로 생각하기에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게 되어 도저히 살 리가 없으리라 생각했겠지만, 뜻하지 않게 이로부터 중국의 웅장한 경관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조선의 배신(陪臣)으로서 직사(職事)로 오는 자는 해마다 없는 적이 없지만, 모두 요동(遼東)의 한 길로만 들어오게 되니, 드넓은 땅과 수많은 인구와 성지(城池)와 병갑(兵甲)의 날카로움, 성명(聲名)과 문물(文物)의 아름다움, 고금(古今)과 흥망(興亡)의 자취를 본디 두루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대의 행차에서는 장차 회계(會稽)로 가서 전당(錢塘)을 넘고, 연릉(延陵)을 회상하며 장강(長江)을 건너고, 여량(呂梁)의 험난을 겪고 가풍대(歌風臺)의 유적에 오르고, 높다란 태산(泰山)과 빽빽한 공림(孔林)을 보고, 황도(皇都)의 장관까지 다 볼 것이니, 조선에서 견문(見聞)이 넓기로 최고라 하는 자도 그대를 앞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또한 이번 행차의 ‘아침에 잃어버렸다가 저녁에 찾는다’는 데 해당됩니다. 수당(隋唐)시대에 죽국의 군주는 영토의 확장과 공을 남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우쭐대고, 신하들은 다시 한진(漢晉)의 옛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전화(戰禍)가 잇달아 몇 세대동안 편안한 날이 없었고, 평양과 부여의 은황색 벌판에는 흐르는 피가 천리에 이르고, 음식 짓는 연기가 끊어져 위태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태조고 황제(太祖高 皇帝)께서 천하를 평정한 초기에 여러 신하 가운데는 또한 고려를 군현(郡縣)으로 삼자고 청하는 자가 있었지만, 황상(皇上)께서는 솔선하여 신속(臣屬)한 점을 고려하여 그 군주를 세워 조선의 국왕으로 삼아 저 동방의 성자신손(聖子神孫)을 보호하고 대대로 가법(家法)을 지키도록 하니, 조선인은 자자손손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 압록의 물과 주필(駐蹕)의 산(山)이 더욱 높고도 맑았고, 옛일은 아득하여 힐문(詰問)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대명(大明)이 베풀어준 은혜입니다. 그대가 고국(故國)에 돌아가 그대의 군주를 알현하여 내 말을 아뢰어, 신절(臣節)을 더욱 굳게 하고 직공(職貢)을 더욱 다듬어 영원히 우리의 동토(東土)의 울타리가 되면, 그대도 무궁한 영예를 갖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이번 행차의 ‘아침에 잃었다가 저녁에 찾는다’는 데 해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최부는 재배(再拜)하고 말하기를, “멀고 먼 땅에서 온 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행운입니다만, 지극한 가르침을 듣게 된 것은 더 큰 행운입니다. 끝없이 넓은 천지에서 오직 이를 우러러 가슴속에 새기겠습니다. 만약 훗날 정식으로 중국 땅에 들어와 바람을 따라 황금대(黃金臺)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낯선 손님은 아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최부와 장보 모두에게 큰 의미를 남겼다. 하지만 그 만남을 바라보는 관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장보는 ‘최부가 지극한 가르침〔至敎〕을 받아 우러러 가슴속에 새기겠다〔從勒瞻遡〕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재배(再拜)했다’라고 적었다. 최부는 ‘장보가 내가 미치지 못하는 듯합니다〔我殆不及矣〕라고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下跪〕’라고 기록했다. 조선과 명나라 지식인의 치열한 자존심 대결로 밖에 생각할 수 없어 웃음이 나온다.

장보의 글에는 명나라가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대명(大明)이 베풀어준 은혜〔大明覆燾之恩〕’와 ‘영원히 우리의 동토(東土)의 울타리〔永藩垣我東土〕.’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교린 정책(交隣政策)을 표방하면서도 기미 정책(羈縻政策)을 취하고 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 참고 문헌   

  

∎ 『崔溥 漂海錄 譯註』, 최부 지음, 박원호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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