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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03. 2021

발해 남쪽 하늘, 바다와 이어져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一絶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一絶     

최부(崔溥) 지음, 고광문 역주(譯註)


渤海之南天接水 발해 남쪽 하늘, 바다와 이어져

鰌潮鼉浪無涯涘 거센 물결 가도 가도 끝이 없네

耽羅國在渺茫中 탐라국은 멀고도 아득하게 있으니

一點彈丸六百里 한 점 탄환 같은 섬, 둘레 육백리


발해(渤海)

여기서는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발해(渤海)를 말한다.

「남차삼경(南次三經)」에서는 ‘단수(丹水)가 산속에서 흘러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渤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동차삼경(東次三經)」에서는 ‘무고산(無皐山) 산꼭대기에 서면 남쪽으로 발해(渤海)가 보인다’고 하였다. 「해내서경(海內西經)」에서는 ‘하수(河水)가 곤륜허의 동북쪽 모퉁이에서 흘러나와 이 산의 북쪽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발해(渤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해내동경(海內東經)」에서는 ‘요하(遼河)가 백차산(白岔山) 동쪽에서 발원하여 요양(遼陽)을 거쳐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渤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서 발해라고 불렸던 곳은 지금의 발해보다 훨씬 크고 현 황하의 일부분을 포함한다.


추조(鰌潮)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바다 가운데 추라는 물고기는 길이가 수천 리나 된다. 해저의 구멍에서 사는데, 구멍에 들어가면 바닷물이 넘쳐서 조수가 되고 구멍에서 나오면 조수가 물러난다. 구멍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규칙적이기 때문에 조수가 일정하게 발생한다〔海中鰌長數千里, 穴居海底, 入穴則海溢爲潮, 出穴則潮退, 出入有節, 故潮水有期〕”라고 하였다.

타랑(鼉浪)

타랑(鼉浪)은 경도타랑(鯨濤鼉浪) 또는 경파타랑(鲸波鼍浪)의 줄임말로 고래 파도 악어 물결, 즉 거세고 험한 파도를 일컫는다.

『표해록』 5월 26일 일기에서 ‘왕헌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중략) 지금 당신은 험한 파도와 월남, 연북 지방을 두루 다 거쳤다〔王憲復來曰 (…) 今你則歷盡鯨濤鼉浪越南燕北〕.’라는 내용이 나온다.


탐라국(耽羅國)

탐라국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유인궤전(劉仁軌傳)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후한서(後漢書)에는 섭라(涉羅),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탐모라국(耽牟羅國), 신당서(新唐書) 등 국내외 사서에는 담라(儋羅), 혹은 탐부라(耽浮羅), 탁라(乇羅), 탁라(托羅), 탁라(託羅), 둔라(屯羅) 등이 나타나 있다. 

탐라국은 ‘섬나라’라는 의미로서,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이미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서 동국방음(東國方音)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라(羅)라 하며 탐, 섭, 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일점탄환(一點彈丸)

일점탄환(一點彈丸)은 망망대해에 있는 섬을 가리키는 말이다.

『표해록』, 윤정월 4일 일기에 ‘뱃사공이 동북쪽을 가리키기에 바라보니, 마치 한 점 탄환과 같은 섬이 아득한 곳에 있었습니다〔梢工指東北 望有島若一點彈丸於縹緲間〕’라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섬을 탄환으로 표현한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중종(中宗) 36년 1월 3일에 제주 목사(濟州牧使) 조사수(趙士秀)가 올린 상의 상소(上疏)에는 ‘하물며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이겠습니까? 탄환(彈丸)보다 작은 이곳에서 소리치며 사람을 부르고 애쓴다 한들 사방에 성원해 줄 이가 없으니 힘이 떨어지고 기운이 다하여 앉은 채로 어육이 될 터인데, 이 또한 반드시 닥칠 사세입니다〔何況絶海孤島 小於彈丸 叫呼招勤 四無聲援 力窮勢竭 坐爲魚肉 此亦必至之勢也〕’라 하였으며, 영조(英祖) 33년 10월 22일에 임금이 감귤(柑橘)을 진공(進貢)한 제주(濟州) 사람들에게 ‘너희의 탄환(彈丸)만한 작은 섬이 먼 바다 끝에 있으니, 조가(朝家)에서 접제(接濟)하지 않으면 어찌 살아 가겠는가?〔念汝彈丸小島, 逖在海陬, 非朝家接濟, 何以濟活耶〕’라 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육백리(六百里)

제주도의 둘레가 육백 리라는 말이다. 조선 시대의 기록들에서 제주도의 둘레는 사백 리 또는 오백 리로 기술하고 있다. 최부는 어떤 근거로 제주의 둘레를 육백 리라고 하였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제주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제주목(濟州牧), 동쪽은 정의현(旌義縣) 경계까지 80리이고, 서쪽은 대정현(大靜縣) 경계까지 81리이며, 남쪽으로는 바다까지 1백 20리이고, 북쪽으로 바다까지 1리이다. 정의현(旌義縣), 동쪽으로 제주 경계까지 26리, 북쪽으로 제주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 경계까지 37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7리이다. 대정현(大靜縣), 동쪽으로 정의현 경계까지 57리이고, 남쪽으로 바다까지 10리이고, 서쪽으로 제주 경계까지 37리이고, 북쪽으로 제주 경계까지 32리이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제주도의 크기는 대략 남북으로 1백 21리, 동서로 1백 60리이다. 그리고 제주도를 형태를 네모꼴로 생각했을 때 둘레의 길이는 대략 5백 62리로 계산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던 최부는 이러한 계산을 근거로 제주도의 둘레를 육백리(六百里)라 했을 것으로 유추해 본다.

오늘날 측정한 중앙의 한라산을 중심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타원형인 제주도 실측치는 동서 73km(182.5리), 남북 31km(77.5리)이며, 일주도로 길이는 181km(452.5리), 해안선은 258km(645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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