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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14. 2021

송악에 왕건이 일어나 나타나 궁예를 쓸어내니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第十二絶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十二絶     


최부(崔溥) 지음, 고광문 역주(譯註)


松岳龍興掃黑金 송악에 왕건이 일어나 나타나 궁예를 쓸어내니

預先歸去獻其琛 먼저 돌아가 보배를 바쳤네

奈何變作逋迯藪 어찌하여 일변해서 도망자의 소굴이 되어

流入胡元染惡深 오랑캐 원나라가 들어와 못된 풍습 물들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가 개국해서 탐라와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고 삼별초의 난으로 탐라를 정벌하고 원나라에서 목장을 설치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려 태조(太祖) 20년에 태자 말로(末老)를 보내어 조회하니, 성주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숙종(肅宗) 10년에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만들었고, 의종(毅宗) 때에 강등하여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에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4년이 지나 왕이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쳐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었는데, 20년에 왕이 원 나라에 조회하고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 나라 승상 완택(完澤) 등이 아뢰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우리에게 예속시켰다. 이듬해에 제주(濟州)로 고치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다. 26년에 원 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 그 땅에 말을 방목하다가 31년에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 5년에 좀도둑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미니, 그 지방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모두 베고 원 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1년에 원 나라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원 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탐라만호(耽羅萬戶)로 삼았다. 아단불화가 본국의 천한 노예 김장로(金長老)와 함께 주(州)에 이르러 만호 박도손(朴都孫)을 매질하고 바다에 던져 죽였다. 16년에 원 나라가 이 주(州)를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켰다. 이때에 원 나라 목자(牧子)들이 사나워서 여러 번 국가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를 죽이고 배반하였다. 김유(金庾)가 토벌하게 되니 목자들이 원 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두기를 청하였다. 왕이 아뢰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목자들이 기른 말을 가려 바치기를 전례와 같이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그대로 좇았다. 18년에 원 나라 목자 하치[哈赤]가 제 마음대로 날뛰어 관리를 살해하니, 6년 뒤에 왕이 도통사 최영(崔瑩)을 보내어 하치를 쳐서 멸하고 다시 관리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高麗太祖二十年 遣太子末老來朝 賜星主 王子爵 肅宗十年 改乇羅 爲耽羅郡 毅宗時 降爲縣令官 元宗十一年 叛賊金通精領三別抄 入據其地 越四年 王命金方慶討平之 忠烈王三年 元爲牧馬場 二十年 王朝元 請還耽羅 元丞相完澤等奏奉帝旨 還隷于我 翼年 改爲濟州 始以判秘書省事崔瑞爲牧使 二十六年 元皇太后又放廏馬 三十一年 復還于我 忠肅王五年 草賊士用 嚴卜起兵構亂 土人文公濟擧兵盡誅之 聞于元  復置官吏 恭愍王十一年 請隷于元 元以副樞文阿但不花爲耽羅萬戶 阿但不花與本國賤隷金長老到州 杖萬戶朴都孫 沈于海 十六年 元以州復來屬 時元牧子强暴 累殺國家所遣牧使 萬戶以叛 及金庾之討 牧子訴于元 請置萬戶府 王奏請 令本國自署官 擇牧子所養馬以獻如故事  帝從之 十八年 元牧子哈赤跋扈 殺害官吏 越六年 王遣都統使崔瑩討滅哈赤 復置官吏 本朝因之〕     

송악룡흥소흑금(松岳龍興掃黑金)

송악룡(松岳龍)은 송악의 용으로 고려를 개국한 왕건을 말하고 흑금(黑金)은 궁예가 도읍으로 정한 철원을 의미한다. 『고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편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태조가 일찍이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해 3월에 객상(客商) 왕창근(王昌瑾)이 당 나라에서 와 저잣거리의 가게에 있었는데, 문득 저자 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니, 용모가 웅장하고 수염과 머리털은 희며 옛 관을 쓰고 거사(居士)의 옷을 입었으며 왼손에는 바리때를 들고 오른손에는 헌 거울을 쥐고서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느냐?" 하므로, 창근이 쌀을 주고 거울을 사서 시장 담벼락에 걸어 놓았다. 거울에 햇빛이 비치자 은은히 가느다란 글자가 드러나 읽을 수 있었는데 그 대략에, “삼수중(三水中) 사유하(四維下)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辰)ㆍ마(馬)에 내려보내어 먼저 계(鷄)를 잡고 뒤에 압(鴨)을 칠 것이다. 사년(巳年) 안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금(黑金) 동쪽에 형상을 나타내어, 성함을 보이기도 하고 쇠함을 보이기도 하는데 하나가 성하고 하나가 쇠하면 나쁜 진재(塵滓)를 없앨 것이다." 하였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를 보고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여기고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가 창근에게 명하여 물색(物色)해서 그 사람을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다만 동주(東州) 발삽사(勃颯寺)에 진성(鎭星)의 낡은 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모양과 같았으며 왼손과 오른손에 역시 바리때와 거울을 쥐고 있었다. 창근이 기뻐서 자세히 그 모양에 대해 아뢰었더니, 궁예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文人) 송함홍(宋含弘)ㆍ백탁(白卓)ㆍ허원(許原) 등을 시켜 이를 해석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말하기를, “삼수중 사유하 상제가 아들을 진ㆍ마에 내리셨다는 것은 진한(辰韓)ㆍ마한(馬韓)이요, 사년 중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 중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금 동쪽에 형상을 나타낸다 한 것은,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 용(龍) 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을 이른 것이다. 왕시중(王侍中)이 왕후(王侯)의 상(相)이 있으니, 이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흑금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鐵圓 철원(鐵原))을 이름이다. 지금의 임금이 처음 이곳에서 성하였는데 아마 마침내 이곳에서 멸망할 것인가 보다. 먼저 계를 잡고 뒤에 압을 친다는 것은 왕시중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 뒤에 먼저 계림(鷄林 신라(新羅))을 얻고 뒤에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였다. 세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왕이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입게 될 것이며, 우리들 역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이윽고 거짓으로 꾸며서 고하였다.

  

예선귀거헌기침(預先歸去獻其琛)

『고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편에 ‘을유 8년(925년) 11월에 탐라(耽羅)에서 지방의 산물을 바쳤다’라 하였다. 이어서 ‘무술 21년(938년) 겨울 12월에 탐라국(耽羅國)의 태자 말로(末老)가 와서 조회하니, 성주(星主) 왕자의 작(爵)을 내려 주었다’라고 전한다. 

 

내하변작포도수(奈何變作逋迯藪)

『고려사절요』 「원종 순효대왕(元宗順孝大王)」편에 신미 12년(1271년) 5월 삼별초가 탐라로 들어간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3군이 진도를 토벌하였다. (중략) 적당 김통정(金通精)은 나머지 무리를 거느리고 탐라(耽羅 제주도)로 도망해 들어갔다. 과거에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 안방열(安邦悅)이 구도(舊都 개성)로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태조의 영전에서 점을 쳤는데, 반은 존(存)하고 반은 망하는 점괘를 얻었다. 망하는 것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요, 존하는 것은 섬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적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에 들어가 있으면서 적에게 유세하기를, “용손(龍孫)은 12대에 끝나는데 남쪽으로 가서 제경(帝京)을 이룩한다.[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는 참설(讒說)을 이에 징험할 수 있다고 하면서 드디어 적의 모주(謀主)가 되었다. 패하게 되자, 빠져 나와 김방경에게 가 보려고 하였는데 군사들이 쳐서 죽였다. 이 때 적장(賊將) 유존혁(劉存奕)이 남해현을 점거하고 연해 지방을 쳐서 노략질하다가, 적이 탐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배 80여 척을 거느리고 따라갔다.

     

포도수(逋逃藪)

포도수(逋逃藪)는 죄를 짓고 도망한 자를 받아주는 소굴을 말한다.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이제 상왕(商王) 수(受)가 무도(無道)하여 하늘이 내린 물건을 함부로 버리며, 증민(烝民)들을 해치고 포학하게 하며, 천하(天下)에 도망한 자들의 주인이 되어 마치 못과 숲에 모이듯 합니다.〔今商王受無道 暴殄天物 害虐烝民 爲天下逋逃主 萃淵藪〕”라고 한 구절에서 연유한 말이다. 

  

류입호원염악심(流入胡元染惡深)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편에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후에 원나라에서 탐라에 말을 기르는 목장을 만들었고 관리를 두었는데 그 자세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충렬왕(忠烈王) 3년 정축에 원나라 조정(朝廷)에서 목마장(牧馬場)으로 삼았는데, 21년 갑오에 왕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나라 승상(丞相) 완택(完澤) 등이 상주(上奏)하여, "그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는 것이 옳겠다."하는 성지(聖旨)를 받았고, 익년(翌年) 을미에 탐라를 고쳐 제주로 하였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으며, 26년 경자에 원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한 내구마(內廐馬)를 방목(放牧)하였는데, 31년 을사에 도로 본국(本國)에 환속하였다. 충숙왕(忠肅王) 5년 무오에 초적(草賊) 사용(士用)·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亂)을 꾸미니, 본토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모두 잡아 죽이고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8년 기유에 원나라의 목자(牧子) 합치(哈赤)가 발호(跋扈)하여 관리를 살해하였는데, 6년이 지나 23년 갑인 8월에 나라에서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을 보내어 합치(哈赤)를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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