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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15. 2021

후풍도 입구에는 김방경이고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第十三絶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十三絶

     

최부(崔溥) 지음, 고광문 역주(譯註)


候風島口金方慶 후풍도 입구에는 김방경이고

明月浦頭都統瑩 명월포 어귀에는 도통사 최영이네

前後旌旗盖海來 앞과 뒤의 많은 군사 바다를 건너올 때

渠心厭亂知相應 저들도 난리를 싫어하여 서로가 내응했네


후풍도(候風島)

후풍(候風)은 배가 떠날 때 순풍(順風)을 기다린다는 말이고 후풍도(候風島)는 추자도(楸子島)를 가리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에 얽힌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가 진도로부터 탐라에 들어와서 내외성을 쌓고 험함을 믿고 더욱 창궐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흔도(忻都)와 더불어 추자도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리는데, 밤중에 바람이 급하여 지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더니, 새벽에 보니 이미 탐라에 가까워졌는데 바람과 큰 파도가 세차서 오도가도 못하였다.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국가가 편안하고 위태함이 이 한 번 싸움에 달렸는데, 오늘의 일은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니, 조금 뒤에 풍랑이 그쳐 마침내 진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탐라 사람들이 그 공을 생각하여 후풍도(候風島)라고 이름하였다. 

    

김방경(金方慶)

김방경(金方慶)은 고려 후기(고종~충렬왕) 행영중군병마원수, 도독사, 중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270년 6월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방경은 삼별초 토벌의 임무를 맡아 삼별초의 공격을 받고 있던 전주(全州)와 나주(羅州)를 위기에서 구했다. 또한 진도(珍島)의 대안에서 토벌에 매진하였으나 무고(誣告)를 당해 개경으로 압송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곧 석방되어 상장군(上將軍)에 제수됨으로써 다시 삼별초의 토벌에 참여하였다. 원나라의 원수 아해(阿海)의 후퇴를 막는가 하면 단독으로 고려군을 이끌고 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이듬해 새롭게 원나라의 원수로 임명된 흔도(忻都)와 더불어 진도를 사방에서 공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공으로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탐라(耽羅)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을 평정하는 책임을 맡아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고 탐라를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그 해 가을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의 세조(世祖)의 환대를 받았다.

『고려사절요』 「원종 순효대왕(元宗順孝大王)」편에는 김방경이 탐라의 삼벌초를 토벌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계유 14년(1273년) 4월 흔도⋅다구 등이 반남현(潘南縣 전남 나주(羅州))에 주둔하였다가 장차 출발하려 했는데 여러 도의 전함이 모두 떠내려가고 침몰되었다. 김방경이 흔도 등과 더불어 군사 1만 명과 전함 1백 60척으로 추자도(楸子島)에서 멈추었다가 바람을 기다려 탐라로 들어갔다. 중군이 함덕포(咸德浦 제주(濟州) 남방 30리)로부터 들어가니, 적이 암석 사이에 복병하였다가 뛰어오르고 크게 외치며 항거하였다. 방경이 크게 소리쳐 꾸짖고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뛰어나가 적의 가운데로 들어가니, 사졸들이 세력을 믿고 다투어 나갔고 장군 나유가 선봉을 거느리고 뒤따라 와서 죽이고 생포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좌군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楊島)로부터 바로 적의 진지에 들이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듯 내성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을 넘어 들어가며 화전(火箭)을 사면으로 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고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김통정은 그 무리 70여 명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도망하여 들어가고, 적장 이순공(李順恭)⋅조시적(曹時適) 등은 한쪽 어깨를 벗고[肉袒] 나와서 항복하였다. 방경이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내성으로 들어가니, 부녀자들이 소리 지르며 울었다. 방경이 말하기를, “적의 괴수는 죽이되 협박 받아 따른 사람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다만 김원윤(金元允) 등 6명만 베고, 항복한 자 1천 3백여 명을 여러 배에 나누어 있게 하며, 원래 탐라에 살던 사람은 전과 같이 편안히 자리 잡고 살게 하였다. 이에 흔도가 몽고군 5백 명을 주둔시키고 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게 하고 돌아왔다. 나주에 와서 적당 35명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였으며, 크게 잔치하여 군사들을 먹이고 모든 지방의 군사를 해산시켰다.

윤월에 탐라에 주둔하였던 장군 송보연이 적의 괴수 김통정의 시체를 찾아 아뢰고, 또 적장 김혁정(金革正)ㆍ이기(李奇) 등 70여 명을 수색 체포하여 다구에게로 보내니, 모두 죽였다. 원 나라에서 탐라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였다. 

    

명월포두도통영(明月浦頭都統瑩)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월포(明月浦)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 서쪽 60리에 있는데 바다 어귀에 선박을 댈 만하다. 최영(崔瑩)이 하치[哈赤]를 토벌할 때 목자(牧子) 질리필사(迭里必思)의 무리가 30여 기(騎)로 이 포구에서 막으니, 큰 군사가 일제히 나가 힘껏 쳐서 크게 물리쳤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4(恭愍王四)」편에는 최영(崔瑩)이 하치[哈赤]를 토벌한 일을 보다 상세하게 적고 있다.

갑인 23년(1374년) 가을 7월에 한방언(韓邦彦)이 제주에 이르니, 합치(哈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감히 세조황제(世祖皇帝, 홀필렬, 쿠빌라이 칸)가 놓아 기르게 한 말을 대명(大明)에 바칠 수 있으랴.” 하면서, 말 3백 필만 보내었다. 임밀(林密)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제주의 말이 2천 필의 수효를 채우지 않는다면 황제가 반드시 우리들을 죽일 것이오니, 오늘 왕에게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왕이 답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제주를 치기로 의논하여 문하찬성사 최영 등에게 명해서 가서 치게 하니, 전함이 3백 14척이요, 날랜 군사가 2만 5천 6백 5명이었다.

8월에 종친⋅재⋅추⋅대언 이상의 관원에게 각기 말 한 필을 내어 명나라에 진헌하는 데 돕게 하고, 한방언(韓邦彦)을 곤장을 쳐서 귀양보냈다. 최영이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탐라의 명월포(明月浦)에 이르니 적이 1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항거하였다. 모든 군사가 언덕 아래로 내려가서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으므로, 최영이 비장(裨將) 한 사람을 목 베어 돌리니 대군(大軍)이 일제히 진격했다. 좌우 양쪽에서 분발해서 적을 크게 깨뜨리고, 적의 괴수 3명을 목 베어 머리를 서울로 보내니, 탐라가 평정되었다.

      

거심염란지상응(渠心厭亂知相應)

김방경이 탐라를 쳤을 때 적장 이순공(李順恭)⋅조시적(曹時適) 등은 한쪽 어깨를 벗고[肉袒] 나와서 항복한 일을 말한다.

육단(肉袒)은 웃통을 벗어 상체를 드러내는 일을 말한다. 복종(服從)⋅항복(降伏)⋅사죄(謝罪) 등(等)의 뜻을 나타내며 중국 고대에 죄인이 사죄(謝罪)할 때 한쪽 어깨를 벗고 사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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