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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15. 2021

김통정의 거친 피 쏟아져 웅덩이 이루고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十四絶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十四絶

     

최부(崔溥) 지음, 고광문 역주(譯註)


通精暴血濺池潢 김통정의 거친 피 쏟아져 웅덩이 이루고

哈赤頑魂飛劒鋩 합적의 완악한 혼 칼끝에 흩어졌네

網盡鱣鯨付鼎鑊 큰고기 모두 잡아 정확에 삶았더니

年來無復海波揚 여러 해 전부터 거친 파도 다시 일지 않았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별초와 관련된 고적(古跡)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토성(古土城) 주 서남쪽 36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삼별초가 쌓은 것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 

고장성(古長城) 바닷가에 따라 둘러 쌓았는데 둘레가 3백여 리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니, 왕이 시랑 고여림(高汝林)의 무리를 탐라에 보내어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방비하고, 인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성 안에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고려 원종 12년에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삼별초를 진도에서 토벌하여 물리칠 때,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와서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 성을 쌓아서 막았다. 방경의 무리가 나아가 쳐서 함락시키고, 천호 윤방보(尹邦寶)를 시켜 원 나라 군사 4백 명과 관군 1천 명을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애월목성(涯月木城) 주 서쪽 42리에 있는데 곧 삼별초가 쌓은 것으로서 관군을 막던 곳이다. 지금은 반은 퇴락하였다. 동제원(東濟院) 주 동쪽 9리에 있다. 남은 터가 있는데 곧 이문경(李文京)이 군사를 진쳤던 곳이다.

송담천(松淡川) 주 동쪽 13리에 있다. 이문경(李文京)이 군사를 놓아 불사르고 약탈하니, 고여림(高汝林)의 무리가 이곳에서 맞아 싸워 이기지 못하였다. 문경이 관군을 모두 죽이고 조천포(朝天浦)에 웅거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원나라에서 설치한 관청과 관련된 고적(古跡)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루가치부〔達魯花赤府〕⋅군민안무사부(軍民安撫使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나라 탑라치〔塔羅赤〕가 소⋅말⋅낙타⋅나귀⋅양을 싣고 와서 수산평(水山坪)에 방목하였는데 말이 번식하였다. 이 뒤에 원 나라에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총관부(摠官府)를 설치하고 고인단(高仁旦)을 총관으로 삼아 부의 행정을 처리하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그 뒤에 또 군민안무사부(軍民安撫使府)를 설치하고 탑치(塔赤)로 다루가치를 삼아 부의 일을 처리하다가 조금 뒤에 또 파하고, 도로 고려에 예속시켰다. 지금 주 성 북쪽 해안에 옛 관부의 남은 터가 있는데, 의심컨대 곧 그 땅인 듯하나, 상고할 수 없다.

   

통정폭혈천지황(通精暴血濺池潢)

현용준은 『제주도전설』(서문당, 1976)에서 김통정에 대한 전설을 채록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려 때의 일이다. 한 과부가 있었다. 과부는 온몸에 비늘이 돋아 있고, 겨드랑이에는 자그마한 날개가 돋은 아이를 낳았다.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를 지렁이와 정을 통하여 낳았다 하여 ‘지렁이 진’자 성(姓)을 붙이고 ‘진통정’이라 불렀다(혹은 지렁이의 ‘질’음을 따서 ‘질통정’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 아이가 바로 김통정(金通精)인데, 성이 김씨로 된 것은 김씨 가문에서 ‘진’과 ‘김(金)’이 비슷하다 해서 자기네 김씨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김통정은 자라면서 활을 잘 쏘고 하늘을 날며 도술(道術)을 부렸다. 그래서 삼별초(三別秒)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제주도에 들어와서 토성을 쌓았다. 흙으로 내외성(內外城)을 두르고 안에 궁궐을 지어 스스로 ‘해상왕국’이라 한 것이다.

어느 해 김방경(金方慶) 장군이 거느리는 고려군이 김통정을 잡으러 왔다. 김통정 장군은 사태가 위급해지자 황급히 사람들을 성안으로 들여놓고 성의 철문을 잠갔다. 이때 너무 급히 서두는 바람에 아기업개(아기업저지) 한 사람을 그만 들여놓지 못하였다. 이것이 실수였다. 김방경 장군은 토성이 너무 높고 철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도리가 없었다. 이때 아기업개가 나타나서 열나흘 동안 쇠문을 녹이라고 일러주었다. 이래서 아기업개 말도 들으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이다.

김통정 장군은 곧 날개를 벌려 쇠방석 위로 날아가 앉았다. 이때 김통정 장군은 죽어 가면서 ‘내 백성일랑 물이나 먹고 살아라.’ 하며 홰를 신은 발로 바위를 꽝 찍었다. 바위에 홰 발자국이 움푹 파이고 거기에서 금방 샘물이 솟아 흘렀다. 이 샘물이 지금도 있는데 횃부리 또는 횃자국물이라 한다. 김통정 장군의 처가 죽을 때 피가 일대에 흘러내려 흙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붉은오름이란 이름이 생겼다. 

    

합적완혼비검망(哈赤頑魂飛劒鋩)

합적(哈赤, 하치)은 13세기 원(元)이 제주도에 설치한 목장(아막阿莫)의 관리를 위해 파견된 몽골인(胡)을 말한다. 『고려사절요』에는 목호(牧胡), 달달목자(達達牧子), 달단목자(韃靼牧子), 탐라목자(耽羅牧子)로도 등장한다.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된 후에 원은 제주도의 동서에 목마장을 세웠고, 이 목마장은 원 조정이 관리를 맡아 주재하였다. 합적(哈赤)의 수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으며, 약 1백 년 동안 제주도에 주둔하였다. 합적(哈赤)들은 공민왕의 즉위 후 고려가 반원정책을 펴자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나라에 만호부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며 반란을 획책하였다. 이에 최영 장군이 공민왕의 명에 따라 2만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이를 합적의 난 또는 목호의 난이라고 한다. 

   

정확(鼎鑊)

 정확(鼎鑊)은 전국 시대에 죄인을 삶아 죽이던 형구(刑具)로, 큰 형벌을 받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세 발 달린 솥과 발이 없는 솥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에 죄인을 삶아 죽이던 큰 솥으로, 극형을 뜻한다. 『사기』 『염파전(廉頗傳)』에, “신은 대왕(大王)을 속인 죄가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할 줄 아오니, 신은 청하옵건대, 정확으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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