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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18. 2021

관두량 바위 가에 말안장 내려놓고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第十八絶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十八絶     


최부(崔溥) 지음, 고광문 역주(譯註)


舘頭岩畔卸征鞍 관두량 바위 가에 말안장 내려놓고

海色天光入望寒 바다 색 하늘 빛을 바라보니 쓸쓸하네

貫月槎浮縱所適 불 밝힌 배 띄워 갈 곳으로 놓아주니

南溟無際學鵬搏 끝이 없는 남쪽 바다를 붕새가 날듯이 가네


관두(舘頭)

관두(舘頭)는 전라도(全羅道) 해남현(海南縣)의 관두량(館頭梁)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관두량(館頭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해남현(海南縣)의 남쪽 41리에 있는 관두산(館頭山)이 있으며 그 아래에 제주를 왕래하는 배가 머무른다. 〔館頭山 在縣南四十一里 濟州往來船泊山下〕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관두량은 “현의 남쪽 40리[약 15.71㎞]에 있으며 제주를 왕래하는 자가 이곳에서 바람을 기다린다. 〔館頭梁南四十里 濟州往來者候風船泊於此〕”라고 하였다.

관두량(館頭梁)은 관두포(舘頭浦), 관두량, 관두, 관머리라고도 칭하며 조선시대 제주를 왕래하는 관리들이 이용했던 포구이다. 관리들의 편의를 위하여 관을 설치하였다. 관두량은 고려 때 송과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1074년 고려 문종은 송과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김양일을 송에 보냈다. 김양일이 송으로 출발한 항구가 해남의 관두량이었다. 이후 관두량은 고려와 송 사이의 관무역에서 중심이 되었다. 1127년 송이 멸망하여 관무역이 끊어진 후에는 중국과의 사무역이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중국과의 사무역이 줄어들고 제주도 교역이 활발해졌다. 1429년(세종 11) 고득종(高得宗)의 건의로 관두포에 제주를 드나들던 사람들을 위한 숙박관소인 해진성관(海珍城館)이 개설되었다. 해진성관은 제주와 육지와의 출장 관리의 숙박, 제주 공마(貢馬)에 대한 사료 보급 등을 위해 설치되었다.   

  

안(鞍)

안(鞍)은 말을 탈 때 앉는 안장(鞍裝)을 말한다.

『표해록』에서 최부는 중국 영파부에 표착한 이래 줄곧 안장(鞍裝)을 가지고 이동하였다. 윤정월 18일 일기를 보면 “오산이란 자는 신의 말안장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오산을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윤정월 21일 일기에는 “밤에 허청과 적용이 그곳 이장을 국문하여 제 말안장을 빼앗은 사람을 잡아서 관사에 보고하고 말안장을 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군인들의 빼앗긴 갓과 망건 등은 모두 찾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2월 4일 일기에는 “신은 파총관에게 답하던 말로 답하고 난 뒤 하산에서 해적을 만나고, 선암에서 몽둥이를 맞았던 일을 더 보태고, 가져온 행장에는 말안장 1벌을 또 첨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2월 5일 일기에는 “신이 가진 것은 인신 1개, 마패 1개, 말안장 1벌, 여러 문서와 책이 든 크고 작은 상자 2개, 의복⋅이불⋅갓⋅갓끈⋅구리그릇을 넣은 작은 가죽 부대 1개, 관모와 관모집뿐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부가 고난(苦難)의 상황에도 안장(鞍裝)을 고수(固守) 하였는데 안장(鞍裝)이 말을 타는 깔개라는 목적 외에 주인의 신분이나 재력을 나타내는 구실을 겸하였기 때문이다.

     

관월사부종소적(貫月槎浮縱所適)

최부 등이 탄 배가 어두울 때 출항하여 불을 밝혔음을 이야기한다.

관월사(貫月槎)는 요 임금 때 서해 바다에 떠 있었다고 하는 빛을 내는 나무 등걸로, 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습유기(拾遺記)』 「당요(唐堯)」에, “요 임금이 황제 자리에 오른 지 30년 되는 해에 큰 나무 등걸이 서해 바다에 떠 있었는데, 등걸 위에서 빛이 발하여 낮에는 밝다가 밤에는 사라졌다. 그 등걸은 항상 사해(四海)를 떠돌아다녔는데,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돌았다.” 하였다.

     

남명무제학붕박(南溟無際學鵬搏)

최부는 자신이 탄 배가 남쪽 바다를 향해 나아감을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구절에 비유하고 있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다. 그 등 길이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 못〔天地〕이라 하였다. 〔北冥有魚 其名為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為鳥 其名為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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