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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26. 2021

행단으로 들어가서 공자님을 뵙고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第三十絶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 第三十絶


최부(崔溥) 지음, 고광문 역주(譯註)


路入杏壇謁素王 행단으로 들어가서 공자님을 뵙고

靑衿揖我明倫堂 유생들이 명륜당에서 내게 허리를 굽혀 절하네

誰知萬里滄溟外 누가 알았으랴 머나먼 바다 밖에

有此衣冠禮義鄕 의관이 단정하고 예의 바른 고장이 있을 줄을



제주향교(濟州鄕校)는 1392년(태조 1)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교동에 설립되었으며, 1435년(세종 17) 안무사(安撫使) 최해산(崔海山)이 중건하였고, 1466년(세조 12) 절제사 이유의(李由義)가 중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처례(金處禮)가 지은 비문(碑文)이 있어 제주 향교의 중수 경위를 알 수 있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성균관이 이루어지고 세종(世宗) 17년 을묘에 향교가 지어졌다. 성화(成化) 병술년 봄에 완산(完山) 이유의(李由義)가 제주의 목사로 임명되어 맨 처음 문묘에 참배하고 그 집이 퇴락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개연히 새롭게 하려 하여, 판관 장흥(長興) 이인충(李仁忠)과 의논하여, 드디어 영졸(營卒)에게 명을 내려 순번에 따라 일에 종사하게 하고, 교수관(敎授官) 문소조(文紹祖)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니, 선비는 학업을 던져두고 분주하고 목공은 재주를 다하여 경영하였다. 목사가 매번 공사의 여가에 친히 임하여 지휘하니, 이에 묘무(廟廡)와 재사(齋舍)와 문장(門墻)과 당옥(堂屋)과 변두(籩豆)와 보궤(簠簋 제기(祭器)의 한 가지)와 궤안(几案)과 위판(位板)과, 부엌⋅창고⋅마구⋅변소⋅뜰⋅도로까지 수십 일이 못 되어 빛나게 새로워졌다. 고을의 부로들과 학생⋅아이⋅어른이 듣고 보고 다투어 하례하고 학업으로 서로 권하며 또 말하기를, ‘목사의 공은 이 고을의 전에 없던 것이니, 어찌 돌에 새겨 후세에 보이지 않으리요.’ 하고, 처례(處禮)에게 촉탁하여 명(銘)을 짓게 하였다. 처례가 말하기를, ‘학교의 흥하고 폐하는 것이 정치의 성하고 쇠함에 크게 관련된다. 학교가 이미 수리되었으니, 학교의 규칙도 마땅히 새로워져야 하겠다. 스승된 자가 진실로 능히 세종(世宗)께서 특별히 내려주신 서적을 받들고 성현이 지으신 경전을 가지고서, 학생들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아침에 배우고 저녁에 익히도록 하며, 회옹(晦翁)의 백록동(白鹿洞) 규칙을 게시하여 우러르고 사모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목사가 중수한 아름다운 뜻을 살펴 물 뿌리고 쓸기를 싫어함이 없어서, 지(知)와 행(行)이 아울러 나아가면 성현되기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열 집이 되는 고을에도 오히려 충신 한 사람이 있거든 세 성〔三姓〕이 사는 땅에 어찌 걸출한 이가 없겠는가. 집에 있어서는 자제를 교훈하여 효도를 옮겨 충성을 하게 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조정 일에 분주하여 이름을 후세에 날려, 융성한 조정에서 교화하여 성취시킨 뜻에 부응한다면 어찌 고을 사람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1793년(정조 17) 목사 조명집(曺命楫)이 대성전을 중수하였고, 1827년(순조 27) 목사 이행교(李行敎)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851년(철종 2) 이현공(李玄功)이 서재(書齋)를 건립하였고, 1854년 계성사(啓聖祠)가 건립되었으며, 1872년(고종 9) 목사 조의순(趙義純)이 중수하였다. 1946년에는 이곳에 중학교를 설립하였다가 1957년 학교 확장에 따라 동무(東廡)·서무(西廡)를 철거하였고, 1978년 대성전을 개수하였다.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계성사·좌우 협문 등이 있고,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 

    

로입행단알소왕(路入杏壇謁素王)

로입행단알소왕(路入杏壇謁素王)은 ‘행단으로 들어가서 소왕(素王), 즉 공자님을 뵈었다’라는 말이다.

행단(杏壇)은 ‘은행나무 단’이란 뜻인데 공자(孔子)가 일찍이 강학(講學)하던 곳이다. 여기서는 향교(鄕校)를 가리킨다.

행단(杏壇)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장자(莊子)』 「어부(漁父)」편에 ‘공자께서 검은 장막을 친 듯한 숲에서 노니시다가 행단 위에 앉아서 쉬게 되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께서는 노래를 읊조리며 거문고를 뜯으셨다. 〔孔子遊乎緇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이에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어 그 뜻을 기린다.

소왕(素王)은 공자를 말하는데, 제왕(帝王)의 위에 있지는 못하여도 제왕의 공덕이 있다는 뜻이며, 감투 없는 제왕이란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文廟 在鄕校〕’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묘(文廟)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 등을 배향(配享)했다. 문묘의 구조는 대성전(大成殿)을 정전(正殿)으로 한다. 그리고 대성전의 좌우에 동무(東廡)⋅서무(西廡)를 배치한다. 조선에서는 대성전에 공자를 중심으로 안자⋅증자⋅자사자⋅맹자의 4성(四聖)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인, 송(宋)의 대표 주자학자 6인을 좌우에 배향했다. 동무와 서무에는 각각 중국 명현(名賢) 47인과 우리나라의 명현 9인을 배향했다.     

청금(靑衿)

청금(靑衿)은 ‘푸른 옷깃’이란 말로 유생(儒生)을 의미하며 『시경(詩經)』 「정풍(鄭風) 자금편(子衿篇)」의 ‘靑靑子衿’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靑靑子衿   푸르고 푸른 그대 옷깃이여,

悠悠我心   내 마음에시름 안기네.

縱我不往   나 비록 가지 못해도

子寧不嗣音 그대 어찌 소식 못 전하는가?

靑靑子佩   푸르고 푸른 그대 패옥 끈이여,

悠悠我思   내 생각에 시름 안기네.

縱我不往   나 비록 다녀오지 못해도

子寧不來   그대는 어찌 오지도 못 하는가?

挑兮達兮   안절부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在城闕兮   님은 성에 남아 있다지만.

一日不見   하루를 보지 못 해도

如三月兮   석 달을 못 본 듯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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