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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Sep 27. 2021

아프니까 청춘인가?

기말고사 3일차다. 하루에 두 과목씩 모두 여덟 과목을 보는데, 여섯 과목을 마친 슬민의 스트레스는 임계치까지 치솟았다. 가려는 대학의 전형이 고2까지 학교 성적으로 뽑는다고 하니 실질적으로 지금이 고3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시험은 운 좋게 학원 쌤들의 예상 문제 몇 개가 적중해 그럭저럭 치렀다. 시험이 끝나고 다른 애들은 학원이나 과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슬민은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안이 휑했다.

“엄마, 엄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슬민은 핸드폰을 켰다. 엄마로부터 카톡과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엄마는 지금 노래교실 엄마들과 계곡으로 놀러 왔어. 밥 잘 챙겨먹고 3시에 수학 과외 가는 것 잊지 말고.’

“쳇! 팔자 좋은 엄마네. 난 힘들어 죽겠는데.”

슬민은 부엌으로 가서 밥을 푸려는데 밥그릇이 하나도 없었다. 개수대에는 설거지 거리가 하나 가득이었다. 

“엄마는 왕짜증이야. 딸 시험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놀러가는 데만 신나셨네. 신나셨어!”

슬민은 폭발하려는 짜증을 꾹꾹 내리 누르고 꾸역꾸역 설거지를 했다. 밥을 먹는데 목구멍으로 울컥한 서러움과 분노가 넘어와 목이 메었다. 슬민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오늘 과외 안 갈거야.”

“야, 오늘 안 가면 내일 시험 어쩌려고 그래?”

“내일 시험이 무슨 상관이야. 엄만 놀러갔으면서. 나 피곤해서 잘거야.”

“너, 잔말  말고 시간 맞춰 갔다와.”

“몰라 나 잘거야.”

슬민은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몇 차례 벨이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억눌렸던 긴장이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으아 아, 으아아 아.”

한참을 목 놓아 울고 나니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외틀어진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 슬민은 눈물을 대충 훔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흥 될 대로 되라지. 피곤한데 날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꽁한 생각에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고 말았다.

밖에서 들리는 장사 트럭의 앰프 소리에 눈을 떴다. 핸드폰을 들어보니 다섯 시가 넘었다. 카톡방에는 반 친구들의 절규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 시험에 대한 불만을 폭포수처럼 쏟아냈고 내일 시험에 대해 걱정을 태산 같이 하고 있었다.  

엄마의 카톡이 와 있었다.

‘엄마가 과외 쌤에게 전화해서 시간 조정했으니까, 일곱 시에 가. 알았지. 엄마도 그때는 들어갈거니까. 갔다 오면 엄마가 너 좋아하는 삼겹살 구워놓을께.’

슬민은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 한 잔을 마셨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들여다봤다.

열여덟 살이라고 하기에는 찌들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맹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싱그러운 기운을 내뿜어야할 얼굴이 수심으로 우중충했다. 슬민은 수도꼭지를 끝까지 열었다. ‘쏴’ 소리가 덜 깬 잠기운을 밀어냈다. ‘우퍼, 우퍼’, 세수를 하고나니 정신이 조금 맑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 내린 후에 점점 밝아지는 하늘처럼 거울 속의 아이 얼굴에 낀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슬민이가 고단한 고2를 보내고 있다. 학교수업, 수행평가, 봉사활동, 특별활동, 야간자습, 학원, 과외에 지친 몸으로 기말고사를 치러 내고 있다. 80년대 후반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가끔 슬민 엄마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내가 이렇게 공부했으면 S대 갔어도 여러 번 갔겠다.” 돌아오는 대답은 “모르는 소리 마. 요즘 이 정도 않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했던 어느 교수의 말에 어떤 연예인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아프면 환자지, 청춘이냐?’ 무한경쟁의 교육환경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버지가 슬민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세상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너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미안하구나. 넌 잘하고 있어. 네 앞길에 시련의 가시덤불을 만나더라도 펑펑 울고 눈물 훔치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사랑한다, 슬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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