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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Oct 06. 2021

유희춘과 송덕봉

미암박물관에서 부부에 대해 생각하다

유월의 푸르름을 가득 머금은 메타세쿼이아가 쭉쭉 뻗을 길을 시원스레 달렸다. 아침에 아내와 함께 광주(光州)를 출발하여 담양군 창평 읍내를 지나 대덕면 장산리에 있는 미암박물관(眉巖博物館)에 도착했다. 차를 널찍한 주차장에 대고 보니 9시 10분이었다. 30여 분 남짓 걸렸다.


미암박물관은 『미암일기(眉巖日記)』로 유명한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과 관련된 유물을 관리⋅전시하는 곳이다. 유희춘은 해남(海南) 출신이지만 처 송덕봉(宋德峯, 1521~1578)의 고향이 대덕면에 속한 대곡(大谷)이어서 말년에 장산리에 대대적으로 집을 짓고 안주하였다. 이후 후손들도 대를 이어 거주하여왔다.  

   

미암박물관은 황토 기와머리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입구인 솟을대문의 오색단청 처마 밑에 ‘미암박물관’ 현판이 걸려있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대문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서니 오른편에 널따란 화강암으로 된 시비(詩碑)가 보였다.

                         

至樂吟示成中       지락음을 아내 성중에게 


園花爛慢不須觀   동산에 꽃 흐드러져도 보고 싶지 않고

絲竹铿鏘也等閑   음악 소리 쟁쟁 울려도 관심 없다네

好酒姸姿無興味   좋은 술 고운 자태엔 흥미가 없으니

眞腴惟在簡編間  오직 책 속에서나 참맛을 즐기려오


次至樂吟              지락음에 차운하여


春風佳景古來觀  봄바람 좋은 경치는 예로부터 보던 것

月下彈琴亦一閑  달빛 아래서 타는 거문고도 한적하다네

酒又忘憂情浩浩  술 한 잔이면 시름 잊어 호탕해지는데

君何偏癖簡編間  당신은 어이해 책 속에만 빠져있나요


성중(成仲)은 송덕봉의 자(字)이다. 유희춘이 지극한 즐거움에 대해 읊어〔至樂吟〕 전하자 송덕봉이 화답하였다. 유희춘이 문장으로 유명했지만 송덕봉도 여자 문사〔女士〕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유희춘이 독서에 빠져 살겠다고 하니 성품이 호방한 송덕봉은 한 번 사는 인생 재미나게 살아보잖다.

어쩌면 우리 부부와 똑 닮은 부부가 옛날에도 있었을까? 나는 도서관에 책 빌려서 보고 도서관 강좌 듣는 게 낙인데 아내는 그런 나를 고리타분하게 여긴다.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도 부르자고 한다. 아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다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대문을 슬며시 밀어 잔디가 파릇파릇한 안뜰에 들어섰다. 전면에는 전시관인 모현관(慕賢館)이 떡하니 자리 잡았고, 우측에는 체험관인 배근당(培根堂)과 좌측에는 관장 거처인 달기당(達技堂)이 위치하였다.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돌 포장길을 지나 모현관 현관 앞에 다다르니 왼편에 시비(詩碑)가 또 하나 있었다.                         

磨天嶺上吟           마천령 위에서 읊음


行行遂至磨天嶺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

東海無涯鏡面平  동해는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있구나

萬里婦人何事到  부인의 몸으로 만 리 길 어이 왔는가

三從義重一身經  삼종의리 중하니 이 한 몸 가벼운 것을


유희춘은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끄트머리인 종성에서 19년간 귀양살이할 때였다. 송덕봉은 시어머니 3년 상을 마치고 남편 유희춘과 함께 살기 위해 종성을 향해 담양에서 만 리 길을 떠났다. 여러 날이 걸려 함경도 중간에 있는 마천령 고개에 이르러 송덕봉이 자신의 회포를 읊은 시가 바로 「마천령상음(磨天嶺上吟)」이다.

내가 아내에게 “송덕봉, 대단하지 않아?”라고 했더니, 아내는 피식 웃기만 한다. 웃음의 의미가 뭘까? ‘나도 그 정도는 하지’일지, ‘내가 뭐하러 가겠어’일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 아내는 현관으로 들어선다. 나도 얼른 뒤쫓았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맨 먼저 유희춘 연표와 지도로 보는 일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으로 도니 가계도와 가학이 정리되어 있었다. 옆면에 학맥과 학맥도가 걸려있었고 그 밑에는 유희춘의 외조부인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문집이 놓여있었다. 모퉁이를 도니 『미암일기』 사본이 펼쳐져 있었고 유희춘의 경연 활동을 설명한 액자가 매달려 있었다. 맞은 편에는 『미암집』 목판이 죽 늘어서 있었고 왼쪽 벽에는 유희춘을 기린 의암서원의 현판이 가로로 기대어있었다. 

옆 전시실로 들어가니 의암서원의 역사가 설명되어 있고 옆 벽면에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가 후손에게 재산을 나눠준 분급문기와 별급문기가 펼쳐져 있었다. 다시 모퉁이를 도니 송덕봉의 가계와 여러 편의 시가 전시되어 있었다. 시들 중에 송덕봉이 1571년 단오 무렵 송덕봉이 해남에 새집을 짓고 지었다는 「희신사(喜新舍)」가 마음에 유독 다가왔다.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송덕봉이 부귀영화를 쫓기보다 원앙새처럼 남편과 사랑하며 지내고 싶다는 심정을 노래한 시였다.                         

喜新舍              새집을 좋아하여


天公爲送三山壽  하늘이 삼신산 같은 장수(長壽)를 보내고

靈鵲來通百世榮  신령한 까치도 백세의 영화 알려주리니

萬頃良田非我願  만 이랑의 좋은 밭이 내 소원 아니요

鴛鴦和樂過平生  원앙처럼 화락하며 평생을 지내고파라


유희춘과 송덕봉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하는 병풍을 꼼꼼히 보고 현관을 향해 가니 좌측으로 꼭 유희춘이 초헌(軺軒) 타고 있는 장면이 재현되어 있었다. 미암박물관을 나와 뒤편에 있는 미술관 카페로 향했다. 역시나 앞서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결혼 20년 차인 우리는 어떤 부부일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얼른 오라고 아내가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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