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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Oct 08. 2021

천안(天安) 시절

그 시절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건 

팔할이 천안의 시골길과 박 강수의 노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 3길 9-20 태영그린아파트. 2013년 구월 초에 새로운 직장을 찾아 입주한 사택이다. 그해 칠월에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통보가 떨어졌다. 인생의 황금기인 삼십대를 오롯이 바쳐 일한 회사에서 나가라는 통첩이었다. 그때껏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살아왔기에 정신적인 충격은 걷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십 대 초반의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마냥 망연자실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다시 힘을 내어라 나의 손을 잡아라 

뒤 돌아보지 말고 나아가야지

푸른 나무들도 등을 미는 바람도 

너를 위한 몸부림에 힘겹다

박강수의 「다시 힘을 내어라」 중에서


 알음알음으로 구한 일자리가 천안시 외곽에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회사에서는 15평 아파트 한 호를 사택으로 제공했다. 광주(光州)에 가족을 남기고 차에 살림살이를 싣고 혼자 올라왔다.

아파트는 야산 끝자락에 덩그러니 두 동만 지어져 있었다. 베란다에 나서면 천안 시내까지 시원스레 뚫려 있는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택에서 회사까지 차로 십여 분 거리였지만 포장도로로 돌아서 가는 길이었다. 

며칠 출퇴근하다 보니 사택에서 회사까지 걸어서 삼사십 분 정도 걸리는 시골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길은 아파트 뒤편의 야산과 들판 사이를 지나 논 가운데를 가로질러가다 밭이 있는 언덕을 끼고 돌아 회사까지 이어졌다. 길을 따라 농가, 밭뙈기, 축사, 과수원이 띄엄띄엄 있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시골길을 걸어서 출퇴근했다.  터벅터벅 걷는 동안 머릿속에는 좋지 않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배신감, 증오심, 무력감, 복수심. 사택에 혼자 있을 땐 그런 마음이 더 심해져 잠을 설치기도 했다.

푸른 벼포기들이 서늘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선들거리는 구월 중순의 어느 아침이었다. 길가에 발그레하게 피어 있는 나팔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뭇가지를 감고 올라간 덩굴의 끝자락에 다소곳한 꽃송이에 고개를 기울였다. 순간 환하게 빛을 발하는 수술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의 응시를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니 길가를 따라 여기저기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순간 홀연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번민이 마음의 눈을 가리니 육신의 눈은 떠 있었지만 멀어 있었음에 진배없구나!’ 그제야 여러 날을 다녔던 길가의 생생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후로는 사택과 회사를 오가며 시골길 주위의 생명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다녔다.


가을은 참 예쁘다 하루 하루가

코스모스 바람을 친구라고 부르네

가을은 참 예쁘다 파란 하늘이

너도 나도 하늘의 구름 같이 흐르네

박강수의 「가을은 참 예쁘다」 중에서


길가를 따라 분홍 코스모스, 노랑 코스모스, 부처꽃, 왕갯쑥부쟁이, 구절초, 달맞이꽃, 민들레 꽃씨, 이름 모를 야생화들! 밭뙈기에는 호박꽃, 고추 꽃, 제비콩 꽃, 옥수수 수술, 수숫대. 농가 대문 가와 담 밑에는 다알리아, 금잔화, 분꽃, 샐비어, 감국, 페츄니아, 채송화, 큰꿩의비름, 백일홍. 길섶에는 강아지풀, 억새, 수크령, 토끼풀, 질경이, 무명초들! 시골길의 생명체들이 마음에 하나씩 하나씩 새겨짐에 따라 마음의 고뇌는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벼이삭이 여물어 누런 들에는 안개 끼는 날들이 늘어갔다. 강아지풀꽃과 거미줄에 맺힌 이슬 방울이 점점 더 하얘졌다. 꽃들은 시들어 가다 말라버렸다. 고추는 빨갛게 익어갔고 구기자는 붉게 무르녹았다. 푸르고 꼿꼿하던 풀잎은 갈색으로 쳐져만 갔다. 추수를 마쳐 휑한 들에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꽃은 지고 시간은 저만큼 가네 

작은 꽃씨를 남기고

길을 따라 시간을 맞이하고 싶어 

바람을 기다리네

박강수의 「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 중에서


기온이 내려감에 따라 반팔 티셔츠에서 긴팔 셔츠로 다시 두툼한 점퍼로 옷을 갈아입었다. 걸음걸이도 황소걸음에서 잰걸음으로 바뀌었다. 십이월 어느 아침 온 들에 하얗게 눈이 내렸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쳐 보일러 연통 끝에 고드름이 길쭉하게 매달렸다. 다음해 일월에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으로 발령이 나서 거처를 옮겼야 했다. 천안의 시골길과 나와의 인연은 거기까지 였다.

천안(天安) 시절. 어쩌면 가장 힘들었을 그 시기에 나는 치유의 은혜를 받았다. 시골길의      생명체들과 박강수의 노래는 실직의 아픔에 괴로워하던 나를 보듬어 주었다. 사개월 남짓 그 길을 걸으며 평상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더불어 앞으로 살아가는 길에서 크고 작은 시련을 맞딱드렸을 때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알게 하였다. 천안(天安) 시절은 내 마음에 그렇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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