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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

by 메티콘

여기 살인을 저지른 요제프 블로흐란 남자가 있다. 그는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처럼 돈 때문도 아니고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햇볕 때문도 아니다.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는 물음 때문이다.

전직 축구 골키퍼였던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의 조립공이다. 지각한 그를 현장감독이 힐끗 올려다보자 그는 해고되었다고 생각하고 공사장을 떠난다. 그는 거리와 호텔을 전전하며 친구들에게 전화 연락을 해보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만난 여자 매표원과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그녀가 내뱉은 말을 듣고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는 사건 현장을 떠나 버스를 타고 지인이 운영하는 여관이 있는 국경 마을로 피신한다. 국경에는 지뢰가 매설되어 있고 세관 초소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그는 국경 마을에 머무르며 주변 사람들과 싸우기도 하고 정신적 혼란을 겪는다.

살인을 저지른 블로흐의 상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뫼르소를 섞어놓은 듯이 보인다. 그가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은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시키지만,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모습은 뫼르소를 떠올리게 한다.


블로흐는 불안에 따른 언어 착란증을 겪는다. 그가 “혐오스러운 언어유희병”이라고 부른 이 병증은 국경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더욱 심해진다. 초기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경찰관들의 대화를 혼동한다.


친절하게 말하고 있던 순경들은 무언가 전혀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들은 ‘가시오(Geh weg)’나 ‘명심하시오(beherzigen)’ 같은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틀리게 ‘인도(人道, Gehweg)’나 ‘베허 씨네 염소(Becher-Ziegen)’로 표현했고, 마찬가지로 ‘정당함을 증명하다(rechtfertigen)’란 단어를 ‘제때에 준비된(zur rechten Zeit fertig)’으로, ‘신분을 증명하다(ausweisen)’란 단어를 ‘하얗게 칠하다(ausweißen)’로 의도적으로 잘못 말했던 것이다. 농부 베허 씨의 염소들이 아직 개장이 안 된 수영장으로 밀고 들어가 모든 것을, 심지어 수영장 커피숍의 벽마저도 더럽혀 놓아서 공간을 다시 하얗게 칠하는 바람에 수영장이 제때에 완성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순경들이 그에게 하는 데는 도대체 무슨 뜻이 있는 걸까? 그런 까닭에 문을 닫아놓았으니 인도에 서 있으란 말인가? 순경들이 떠나면서 일상적인 인사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를 조롱하려고 그랬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암시 같기도 했다. (41~42쪽)


병증은 점점 심해져 사물의 명칭 대신 형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다시 방에 혼자 있게 되자, 그는 모든 것의 위치가 바뀐 것을 발견했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거울에 있던 파리 한 마리가 세면기 안으로 떨어져 물에 쓸려 사라졌다. 그는 침대에 앉았다. 의자는 그의 오른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왼쪽에 세워져 있었다. 풍경이 좌우로 바뀐 걸까? 그는 풍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다가, 그다음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는 일을 반복했다. 이렇게 바라보는 일은 그에게 독서처럼 여겨졌다. 그는 ‘옷장’을 보았고, ‘그다음은’ ‘하나의’ ‘작은’ ‘책상을’, ‘그다음은’ ‘하나의’ ‘휴지통을’, ‘그다음은’ ‘하나의’ ‘벽 커튼을’ 보았다.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라보는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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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흐는 커튼을 끌어당겨서 닫고 밖으로 나왔다. (112쪽)


블로흐의 언어 착란증은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에 대한 페터 한트케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한트케는 앞세대인 47그룹을 비판하며 “문학이란 언어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하며 그만의 문학적 가치와 서술 방식을 펼쳐 나간다. 이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혹평을 받지만, 그를 알아보는 소수의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는다. 이 작품에서 그의 이러한 주장을 반영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학교 일꾼이 버팀목에다 도끼를 내려놓고 헛간을 나오면서 갑자기, 아이들이 학교를 떠날 때까지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배운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마지막까지 진정한 자신만의 문장을 한 마디도 말할 수 없고, 거의 모두가 몇몇 단어들로만 이야기할 뿐이라고 했다. 그들이 배운 것은 그저 특별한 논제를 줄줄 외어서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뿐이고, 그걸 넘어 완전한 문장으로 이야기할 능력은 바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 모두는,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언어 장애자들이에요.” 하고 일꾼은 말했다. (94~95쪽)


소설에서 등장하는 학교 일꾼은 학생들을 언급하지만, 이 글을 통해 한트케가 비난하고자 하는 본래의 대상은 ‘있는 그대로 쓰는 참여문학 또는 신사실주의’에 맹목적인 작가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블로흐가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그는 신문 기사를 통해 경찰이 단서를 잡고 추적해옴을 알게 된다. 축구 경기에서 페널티킥이 선언되자 그는 같이 경기를 보는 사람에게 키커와 골키퍼의 대처에 상황에 관해 설명한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골키퍼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 상황에 대해 그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다”라고 덧붙인다.

혹자는 골키퍼 출신의 블로흐가 느끼는 불안의 원인을 대화의 단절에서 찾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화에서 찾기도 한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한트케가 창조한 캐릭터를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 한트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외부세계에서 순수하게 관찰된 어떤 것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것은 관심이 없고, 나 자신의 역사와 얽힌 이야기들을 어떻게 문학의 세계로 가져오는가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알맹이 없는 선전의) 플래카드가 될 것입니다.


블로흐는 한트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해 만들어낸 인물이다. 한트케는 블로흐의 행동과 심리를 통해 독자들에게 언어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지 않을까?


-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 윤용호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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