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담다

나 왔어, 이제 좀 일어나.

by 빵 굽는 옥상농부

여름휴가 이후로 약간의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아니, 솔직히 까발려서 이야기하자면 게으름이 덮쳤다. 휴가와 타지 방문이 여러 번 겹치는 일이 반복된 후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 쌀 씻어 밥 안치는 일이 세상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고 불태웠던 운동 역시 돈 아까워 겨우 얼굴 도장 찍으러 다니는 불량 회원 신세가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지 며칠 몇 주째 이건만 나는 여전히 하면(夏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밤새 안방 베란다 하수관을 타고 흐르던 규칙적인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차가운 새벽 공기가 열어놓은 창틈으로 얄밉게 들어올 때쯤 여름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다가 잠에서 깼다.


비 손님이 있던 밤이 지난 후의 아침엔 으레 옥상에 올라간다. 오늘도 그랬다. 올라가자마자 밖으로 나가기 전 창문 앞에 서서 나무며 꽃을 바라보는데 어제와 다른 장면이 눈에 띄었다. 배나무에 열린 배 세 알 중 한 알이 보이지 않았다. 비다, 비의 두드림에 떨어졌구나.


예상했던 대로 화분 흙 위에 아껴왔던 배가 떨어져 있었다. 상처가 났을까 배를 얼른 주워 들고 살폈다. 흡사 다리 다친 아기새를 두 손에 올리듯 조심스러웠다. 말갛게 빛나는 금색 얼굴을 쑥스럽게 내보이며 내 손에 들려있는 배 한 알에 나의 여름잠은 달아났다.


식탁에 배를 올려놓고 바라보니 지나간 시간들이 생각났다. 나비며 벌이 쉬어가던 배꽃과 한동안은 비가 오지 않아서 또 한동안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맺혔던 배조차 떨어지고 터지기를 수차례, 봄에서 여름으로 이제 가을로 이 배를 지켜보는 동안 계절은 하루하루 변해갔다. 식물은 온몸으로 온 감각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


팔에 감기는 차가운 공기가 꽤 마음에 드는 가을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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