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낮게 나는 새도 멀리봐

Fly - 에픽하이

by 김이름

고3 때 부모님 몰래 MP3를 샀다. 아이리버 제품이었다. 하이마트에 들어가서 유심히 보다가 붉은 색을 띄고 직육면체와 원기둥 사이 어딘가의 모양을 한 이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에 쥘 수 있으면서 조이스틱으로 컨트롤을 하며 노래를 넘길 수 있는 그런 모양새였다. 50곡 정도 담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노래가 많았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리스트를 업데이트하지만 거의 빠지지 않았던 노래가 바로 이 곡이었다.


지구과학을 좋아한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이과를 선택했으나 이과의 꽃이라는 수리 가형과 물리는 나를 항상 좌절하게 만들었다. 내가 진학한 학과 또한 수리 가형의 단원들과 물리는 아주 기본이었는데... 그리고 지구과학은 수리 + 물리의 합작이었다.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지만, 물리와 수리 가형은 지구과학만큼 내 사랑을 나누어 줄 수는 없었는가보다.


학생이 가지고 있는 학업 고민보다 나를 더 짖누르는 걱정이 하나 있었다. 아직도 몇 안되는 사람에게조차 편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니, 지금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에게도 버거웠을 것이다. 오히려 진로를 빨리 정한 것이 다행일 만큼이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던 그때 이 노래가 힘이 되었다.


감히 내가 원대한 꿈을 가져도 되는걸까, 상상은 공짜지만 그것마저 쉽게 취할 수 없었다. 그냥 나는 조금 낮게 날고 싶었다. 남들처럼 높고 빛나는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쉽게 벼랑 끝에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한번 쯤 있을 시기라고 생각했고, 그때의 나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시기였던 듯 하다. 그럴 때면 사람들에게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고도가 있다고 믿는다. 그 고도는 항상 일정하지 않다. 각자의 시기에서 각자의 고도를 지키고 있었고, 지금의 나는 그 고도를 조금씩 올리고 있는 것 뿐이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과 비슷한 결로 어두운 밤일 수록 밝은 별이 더 빛난다는 가사 또한 좋아한다. 암흑 시기에 꾸는 꿈과 희망이 더 빛을 발하며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시기가 아니었던 것을 보면 그래도 버틸만한 인생의 구간이었던 듯하다.


그때 창가 자리에 앉았던 나는, 이어폰을 꼽고 어두운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만 아는 비행 경로를 추적하곤 했다. 교실 뒤쪽, 차가운 형광등이 창에 반사되고 바깥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거울이 되어버린 유리창을 응시하다 눈을 감으면, 어쩌면 창에 반사되어 보이는 내 얼굴이 아니라 누구보다 더 멀리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라는 의미는 거창한 미래를 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을 견딜 수 있는 다음 한 걸음을 의미했다. 낮게 날아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고도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을 믿었다. 그 사실이 조용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낮게 나는 것은 숨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방식 중 하나이다. 아래로 스치며 지나가는 것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절벽 끝에 서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허락한 안전 거리였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해도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알고 있다. 언젠가 더 높게 날아야 한다는 압박감 대신 지금도 충분히 잘 날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 노래를 가끔 듣는다. 그 당시만큼이나 절실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문장의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그 말을 믿고 하루를 버텼고 지금의 나는 버텨낸 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꿈을 크게 꾸고 있지 않은 날에도, 높게 날고 있지 않은 밤에도 나는 방향을 알고 있다. 낮게 나는 시간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멋진 비행이었다. 그리고 그 비행은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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