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전날밤에 팥을 샀지. 마켓컬리에서 안사고 헬로네이쳐에서 샀지. 팥 500g, 찹쌀가루 500g. 절기를 보내는데 진심이 된 주부 1인, 재택근무로 집에 있는 1인, 학교에 안가는 초등생 2인, 넷이서 새알심을 만들고 불린 팥을 삶아 동지팥죽을 만들 셈이었지. 팥죽할머니 이야기를 나누며 동지를 보낼 생각이었지. 호박을 파며 할로윈을 보내는 사람들처럼. 한 번도 안만들어봤지만 어때. 어느 인플루언서 한 명쯤은 팥죽 레시피를 올려놨겠지. 어떻게 만드는지는 이제부터 검색 시작. 어럽쇼, 문제가 생겼네. 2020년의 동지는 팥죽을 먹으면 안되는 동지라네. 애동지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팥죽을 먹으면 애한테 피부병이 생긴다네. 친구에게 말했더니 코웃음을 치네. 애동지가 있으면 애하지도 있나? 아니 친구여 애하지는 모르겠고 노동지는 있다더라.
같이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팥을 삶을 수가 없었네. 우리집엔 아토피인의 피가 흐르는 애가 최소 두 명. 피부병의 피자만 들어도 몸서리가 처친다구. 재택근무 1인에게 삼천원을 쥐어주고 팥죽 대신 먹는다는 시루떡을 사오라 시켰네. 나는 어디서 언제 생겨났는지도 모를 애동지 팥죽금지설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루떡으로 점심을 먹었지. 내가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은 미신이었나 가짜뉴스였나.
생각나네. 1915년 평택군수 셋째딸로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그가 예순다섯살이 되셨을 때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지. 시장에 갈 때면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고,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치맛자락 끝을 착 말아 한 손에 쥐고, 우아하게 대문을 나서셨지. 할머니는 도처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경계하고 존중하셨지. 다시말해 미신을 믿으셨단 말이야. 촘촘한 참빗으로 빗을 때 빠진 머리카락은 빳빳한 달력 종이에 모아놓으셨지. 함부로 버리면 csi가 아니라 귀신이 가져가서 영혼을 조종할 수 있거든. 하지만 할머니는 말씀하셨지. 난 다른 여자들과 달라. 미신 따위 믿지 않지.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성대한 제사를 치르셨지. 거슬러 거슬러 5대조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영혼을 초대하셨지. 저승의 파티피플이여 모두 역촌동 우리 할머니집으로! 잡채와 호박전, 산적과 도라지나물, 아 맞다 드레스코드는 간단해. 노옐로우 노화이트. 하양과 노랑은 부모의 죽음을 상징한대. 엄마는 제삿날이면 내 매무새를 점검하셨지. 병아리모양 노랑머리방울을 풀어 앵두모양 빨강방울로 바꿔야했지. 하얀 리본이 달린 원피스는 당연히 환복조치. 내 드레스코드가 왜 중요했는지는 모르겠어. 어차피 나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골방에 숨어있어야했는데 말야.
할아버지와 아빠가 출근한 다음에 총채로 집안의 먼지를 털면 엄마는 할머니한테 꾸중을 들었지. 신발을 정리할 때 신발코가 현관문을 향하면 꾸중은 또 이어졌지. 우리 엄마 왜 혼내요? 신발 주인이 집을 떠나 저승으로 갈까봐였대. 집안에 남은 그의 흔적이 이승에서 지워질까봐 였대.
사는 내내 죽음이 무서웠던 1915년생 최재정 여사. 과일도 네 알을 먹으면 안되고, 송편도 네 알을 차려내면 안됐지. 세 알이 아니면 다섯 알. 문자가 아니라 숫자여도, 죽을 사 아니고 넉 산데도. 식민지도 전쟁도 다 겪었는데 고작 숫자 4가 무서웠던 최재정 여사. 미역국에 밥을 말 때 밥공기를 그대로 국대접에 엎으면 혼쭐이 났지. 엎어놓은 공깃밥은 무덤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할머니 저랑 얘기 좀 해요. 죽는게 나쁜가요. 파티가 일년에 최소 세 번이라면 괜찮은 죽음 같은데. 할머니 무덤이 나쁜가요. 팀버튼은 어릴 때 매일같이 공동묘지서 놀았다는데. 근데 참 잘 컸쥬. 그분이 그랬어요. 박물관에 가면 어릴 때 자주 놀던 공동묘지가 떠오른다고. 어두컴컴하니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꼭 그래서 그런건 아니지만, 제가 박물관을 좋아합니다 할머니. 어느 여름날 어두컴컴한 박물관에 갔어요. 죽은자들이 묻힌 땅을 지나, 깊숙히 더 깊숙히 바위를 뚫고 쇠가 녹아내리는 지구의 한가운데를 지나 계속 또 내려가면 다시 죽은자들이 묻힌 땅이 나오는데, 아시죠 남아메리카. 그 땅의 커다란 호수 밑에 황금도시를 건설했다는 전설의 주인공들이 있었대요. 천년전인지 이천년전인지 잘 모른대요. 그들이 만든 황금 조각이 캄캄한 전시실에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어요. 박쥐와 개구리, 뱀과 매미를 믿었대요.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동경하고 두려워했대요. 소라껍질을 빻아 코카인가루랑 섞어 마시고 환각 상태에서 신을 만났대요. 할머니, 저는 왜 그곳에서 할머니가 보고싶었을까요. 왜 눈물이 나왔을까요. 할머니의 놋그릇은 황금처럼 반짝거렸죠. 할머니의 멋진 옷들은 사각사각 소리를 냈죠. 그리고 좋은 그릇과 옷가지 사이의 빈 공간, 두려움이 채우고 있었죠. 두려움과 회피와 금기가 가득가득 공간을 매우고 있었죠.
할머니 저는 지금도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지 않아요. 저녁을 차릴 땐 어떤 줄 아세요? 무심코 꽃무늬 숟가락 한 개와 복자무늬 숟가락 세 개를 놓다가 말이에요. 네 식구 중 다른 무늬 숟가락을 받은 한 사람의 앞날이 불행하거나 외로워지면 어쩌지 말도 방구도 안되는 생각이 정말 불현듯 갑자기 시도때도 없이 들어요. 어이가 없네 코웃음을 치면서도 꽃무늬 숟가락을 도로 꼽아놓고, 복자무늬 숟가락을 찾아서 가져와요. 둘째 아이 이름을 태오로 짓고 싶었는데 작명소에서 이 아이의 사주에 맞는 한자가 없다고 했어요. 그렇게 지으면 아프고 불행해질거라고 했어요. 극복을 못하고 포기했죠. 아프기도 많이 아팠어요. 이름을 태오라고 안지어서 그나마 덜 아팠던 걸까요? 할머니 저는 뭐가 두려운걸까요. 제 인생에 어느날 갑자기 불행이 묻을까봐 무서운 걸까요. 묻어서 지워지지않고 먹물처럼 번질까봐 그럴까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이 불행 아닐까요. 그래도 할머니, 신발코는 현관으로 향하게 정리합니다. 팥죽도 동지지나 만들었어요. 저는 미신을 안믿으니까요. 가짜뉴스도 안믿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