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자의 48시간

by 박호단

J는 친한 아이친구 엄마에게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과 외박을 하러 간다고 설레는 맘을 털어놓았다. 그분은 J에게 물었다. “어머 좋겠네 지윤맘~~ 친구들이랑 외박하면 밤에 뭐하고 놀아? 밤사(밤과 음악사이 - 90년대 음악 틀어놓고 춤추고 노는 곳)라도 가나?”


우리는 북촌의 손바닥만한 한옥 숙소 <고이>에서 떡볶이와 캔맥주를 먹고 분리수거를 하면서 이 얘기를 듣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우리 모습이 그분의 상상과 너무나 다른 것 같아서, 서로를 놀렸다. “지윤마암, 밤사도 안갈거면서 외박은 뭐하러 해?” “자네는 분리수거하러 외박나왔나?” “분리수거 다했으면 치카하고 자자.” 그리고 다시 폭소.


고등학교 동창 J, H와 나는 일년에 한 번씩, 세 명 중 두 명의 생일이 모여있는 12월에 함께 외박을 한다. 주로 서울 시내에 방을 잡고 와인 한 병, 차 한 주전자를 나눠 마시고 다리가 퉁퉁 붓도록 한 자세로 앉아서 밤새도록 수다를 떨다가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 시간에 헤어져 각자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탈의 전부이다. 내향적이고, 너무나 FM이고, 어느 한 구석 뜨거운 마음이야 없겠냐마는 폭발한다기 보다는 점성낮은 용암처럼 조용하게 흘러내릴 뿐인 세 사람이라 이 정적인 일탈로도 넘치게 행복하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내향갑인 나는 하룻밤을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서 정말 밤사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녹초가 된다.


그런 나라서 이틀의 시간과 돈이 주어진다면 철저히 혼자 지내는것이아마 제일 행복할 것이다. 상상 속에서아침일찍 아이들과 남편이 내게 손을 흔든다. 엄마 우리 다녀올게. 그래 잘 다녀와. 문이 닫히고 날 닮은 얼굴들이 사라지자 나는 좋아서 온 얼굴 근육을 오므렸다 폈다 해본다. 혼자만의 시간이라니 그간 하고싶었던 것을 해야지. 일단 수 년째 어지럽게 쌓인 아이들방의 레고 브릭을 거실에 와장창 쏟은 다음에 색깔과 모양과 크기별로 구별하여 원래 모델의 구성대로 맞춘다. 아마 이것만도 수 시간이 걸릴 것이다. 팟캐스트를 들으며 작업을 하다보면, 어쩌면 오후가 될 수도 있다.


정리가 다 되면 모델별로 번호를 써서 착착 책장에 꼽아놓고 옷을 대강 입은 다음 페인트 가게에 가서 페인트를 세 통 사올 것이다. 소파가 닿는 거실벽 한 면을 새로 칠할 것이다. 몇 년째 방치하여 얼룩지고 때가 탄 푸른색 벽을 다시 따뜻한 느낌이 나는 노란색으로. 그리고 일기에 짧게 쓸 것이다. “발에 채이던 만 개의 조각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원하는 색을 집에 들었다. 5년만에 숙원사업 완료.”


작업이 끝나면 흡족한 마음으로 목욕을 길게 하겠다. 나무늘보처럼 뭘 해도 오래 걸린다고 타박할 사람도 없고, 엄마 나 유튜브 봐도 되냐고 욕실 문을 두드리는 아이도 없을 때 아주 느릿느리… 읭? 현관문 암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돌아왔다. 어이쿠. 왜 벌써 와? 48시간이 안됐는데? 벽에 페인트칠 했으니까 내일까지 손자국 안나게 조심해라. 밥은 아빠한테 차려달라하고. 나는 48시간은 혼자 있기로 약속했으므로 목욕을 끝내고 집을 나선다.


가방에 책 두 권과 술 한 병을 우겨넣고 7016번 버스를 타고 서촌에 내려 보안여관 31호에 혼자 들어가야지. 창에 경복궁 돌담길과 가로수의 그림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드리워서 나는 감탄하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그대로 누워서 핸드폰삼매경이 되느라 가져간 책 두 권 중 아마 한 권이나 읽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리고 팔을 대자로 뻗고 방해받지 않고 꿀잠을 자겠다. 이불은 사각거렸으면 좋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가로수와 가로등의 콜라보 대신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조각나 들어온다. 서촌엔 맛있는 빵집도 많고, 나는 돈도 많기로 했으니까 비싸고 맛있는 바게트랑 커피로 아침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부암동에 간다. 환기미술관에 처음으로 혼자 가본다. 햄버거집 위에 있는 티하우스에 가서 차를 마시면서 비싸서 못샀던 다구들을 사며 기뻐한다. 그리고는 전철이든 버스든 타고 강을 건너 조선시대 어느 임금의 묘 옆에 자리잡은 김도인의 명상 교실에 가서 저녁 수업을 듣는다. 그는 나의 인생 패턴을 진단하고 감정 지능과 철학적 사고를 향상시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홍보했다.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새로운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뭔지. 현자가 되는 일? 돈을 많이 버는 일? 거기에 명성과 명예까지 얻는 일? 나는 다 모르겠다고 하고 싶다가 알게 된다. 생각을 하든 글을 쓰든 끝에 와서는 늘 회피한다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쓱 넘어가려고 한다는 것을. 나에게 정작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시간이나 돈이나 휴식이 아니라 집요한 문제해결력과 의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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