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작은 아이와의 이별

태권도장 가는 길

by 박호단


횡단보도 앞의 사랑


평일 오후 1시 30분에는 여덟살 둘째 아이가 태권도 도장에 간다. 집에서 5분 거리지만 조심성 없고 늘 까불까불한 아이가 건널목을 혼자 건너는 것이 마음이 쓰여 도장이 있는 건물까지 바래다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와 백 걸음만 걸으면 횡단보도 앞이다. 그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1분 남짓은 아이에게 집중하기 좋다. 빛이 선명한 시간이라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가슴팍 아래서 통통거리는 아이의 얼굴에 생채기는 없는지, 손톱은 짧게 잘 깎였는지, 볼을 꼬집어보기도 하고, 작은 손을 쥐어보기도 하고, 이마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보기도 한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면 그날 그 순간의 조심스러움을 리드하는 사람은 아이로, 나로, 다시 아이로 매번 바뀌어도, 패턴은 같다. 몇 백번 똑같이 함께 약속했던 말들, 왼쪽 오른쪽 차가 멈췄는지 보고 건너기, 장난치지 않기를 또 한 번 다짐하며 손잡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그렇게 이삼십 걸음을 더 걷고 나면, 다정한 시간은 언제였냐는 듯 끝난다. 위험할 것도, 엄마에게 의지해야할 것도 없는 상가건물까지의 백 걸음.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잡았던 손을 냉큼 놓고 당김음을 연주하듯 타닥 타닥 깡총거리며 앞서나간다. 하얀 도복이 나풀나풀, 아이의 머리카락과 팔다리도 팔랑팔랑. 길가에는 바로 옆 언덕까지 쌓아올린 높은 축대에 담쟁이 넝쿨이 수직으로 길게 늘어져있어 뛰어가는 아이가 상대적으로 더 작아보인다.

더 작은 아이와의 이별


신난 아이의 뒷통수에 핸드폰을 가져다대고 영상을 찍으면서 쫓아간다. 10초도 채 못찍고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릴 걸 알면서도, 굳이 다시 찾아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뒷모습을 찍지 못하는 날은 어쩐지 아쉽다. 은행잎을 밟으며 깡총거리는 120cm의 여덟 살 아이와는 곧 이별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리는 벚꽃잎을 맞으며 달려 나가던 115cm의 아이와도 늦봄에 이별했다. 기억 저편 어느 저장공간의 수만개 바둑칸 사이로 숨어버린 그 아이는 무릎이나 고개를 달싹이며 노래하는 걸 어색해하지 않았고, 발음이 지금보다 훨씬 부정확했다.

찍어대는 일상의 사진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구글포토에 시간기록과 저장을 맡긴지 오래 되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과거의 순간들이 “5년 전 오늘을 추억하세요”하는 식의 알림으로 자주 도착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초반에는 알림이 울리면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걸핏하면 아프고, 뭐든지 해내는 일이 굼뜬 유치원생 아이를 건사하는 것이 피로하니 제발 빨리 자라서 내 수고를 덜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3년 전 오늘의 추억이라며 도착한 알람에 아주 오랜만에 보는 돌쟁이 아기가 있었다. 나를 하루종일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잠을 좀 자거나 호흡이 긴 다른 일을 하는 것을 허락지 않던, 위태위태하고 가끔은 날 무섭게도 하던, 하지만 사과머리에 두 개 난 앞니를 드러내며 씽긋 웃는 웃음이 고단한 하루를 다 녹일 만큼 귀여운 존재가 거기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예쁜 아이의 3년 전 과거, 키가 당시보다 딱 한 뼘 작던 시절의 사진일 뿐인데 그 나이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럽던 사과머리의 존재와는 앞으로 영영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리워서 눈물이 울컥 나왔다. 연속되는 시간 속에 한 존재가 자라나는 과정이 있는게 아니라, 단절된 시간의 마디마디마다 다른 존재가 내게 왔다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불완전이별과 완전이별


아이의 더 어린 날과 헤어지는 것은 ‘서른 즈음에’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이별이다. 젊은이가 젊은 날과 헤어지는 건 일종의 불완전변태같은 것이라서 주름이 하나 더 늘거나, 머리카락이 희어진다거나, 뱃살이 조금 더 나오는 정도일 뿐이다. 옛 친구를 만났을 때 감히 “어머 너 그대로구나” 류의 인사를 들을 수 있는 불완전이별이다. 하지만 50cm의 아이가 100cm가 되는 것은 완전변태다. 머리반 몸반이었던 비율이 달라지고, 나름의 세련된 언어가 무작정의 울음을 대체하고, 바닥에 붙어 먼지를 빨던 아기의 하루는 그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180도 달라진다. 다시는 이전 버전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는, 머지않아 건널목을 건너기 전에,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빨리 헤어지고 싶어하는, 지금과는 또 다른 존재로 자랄 것이다.

좋은 이별의 예 콜렉터


아이와 매 순간 잘 헤어지고 싶다. 아이의 과거와 헤어질 때, 이렇게나 어렸는데 좀 더 잘 헤아려줄걸 더 잘해줄걸 하는 후회가 적었으면 좋겠다. 미래에 아이가 완전히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특히 담백하게 헤어지고 싶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호호할머니가 되어서도 얘야 횡단보도 건널 때 차 조심해라 라고 간섭할 것 같다. 우리 귀요미 흰머리 많이 났네 라고 쓰다듬어주고 싶을 것 같다.

그러지 않기 위해 좋은 이별의 예를 수집하고 있다. 어떤 어머니는 “나는 내 아기를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 시민이 될 존재를 기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어떤 작가는 자라는 아이를 향해 “앞으로 너를 모른 척하는데 시간을 쓰겠다”고 했다. “겹쳐 있던 아이와 나의 생을 따로 떼어놓고 나란히 세우는 법을 배우는 일” 이 부모가 해야할 일이라고 썼다.

나는 이제 뛰어가는 아이의 귀여운 뒷통수를 어떻게든 남겨두려고 집착하지 않기로 해본다. 어떤 날은 같이 뛰어도 가보고, 어떤 날은 혼자 가라고 건널목에서 손도 흔들어주면서, 아이가 원할 때 잘 이별하기 위한 선제적 거리두기를 실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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