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한 특별한 일본살이
영화 <바닷 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주인공 네 자매, 사치와 요시노, 치카 그리고 막내 스즈가 살면서 주로 오가던 ‘고쿠라쿠지(極楽寺)!’다. 늘 마음만 있었는데 우연히 <코토리분코(작은 새 책방, ことり文庫, KotoriBunko)>라는 이름처럼 작은 그림책방이 고쿠라쿠지에 있다 길래 겸사해 길을 나섰다. 고쿠라쿠지를 가려면 먼저 ‘가마쿠라(鎌倉)’로 가야한다.
가마쿠라는 '에노시마 전철(江ノ島電鉄’), 일명 ‘에노덴(江ノ電)’이라 불리는 백 년 된 기차를 타고 돌아볼 수 있다. 해인과 나는 후지사와역에서 가마쿠라를 잇는 에도덴을 타기로 하고, 하루 종일 곳곳을 다닐 작정으로 1일 승차권 ‘노리오리군(のりおりくん)’을 샀다.(어른 600엔, 아이 300엔) 드디어 멀리서 자그마한 초록색 에노덴이 다가온다. 흥분한 해인이 연신 감탄사를 연발 한다. 비록 점잖은 척 했지만 내 맘도 설레기는 마찬가지! 에노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많이 낡았다. 손잡이도 좌석도 유리창틀도 모두 오래되었다. 그런데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역시 일본다왔다. 운전석이 훤히 보이는 맨 앞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색적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에노덴은 전철이 다닐 만큼의 기찻길만 남기고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 사이를 달리는 가하면, 노면에서는 자동차와 간발의 차이로 서로 마주보며 지나간다. 장난감처럼 귀여운 건널목을 섰다가 가기도 하고,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달리기도 한다. 에노덴을 탄 것만으로도 벌써 가마쿠라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마침내 고쿠라쿠지역에 닿았다. 플랫폼에 내려서자 70년대의 어느 시간으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누렇게 빛바랜 사진에서나 봄직한 플랫폼을 빠져 나와 소박하게 나이 먹어 아담해진 목재 역사(驛舍)와 마주한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뎌 온 탓인지 역사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과 보는 거뭇해졌고, 곳곳이 벌어졌으며, 나무결을 따라 홈이 파였다. 수많은 풍파를 거치면서 모든 것에 초연한 100세 노인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 수많은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동안 자신을 오갔던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고쿠라쿠지역. 나와 해인을 만났던 이 순간도 기억하겠지! 해인이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소리에 아득한 상상에서 깨어난다. 이제 코토리분코(KotoriBunko)를 찾아야 한다.
책방을 찾아다니며 만나는 풍경은 정겨웠다. 엽서를 넣고 싶은 빨간 우체통, 천정이 낮고 작은 정육점과 그 옆의 중국 요리집, 꽃으로 장식된 아담한 미용실, 세상에서 제일 작을 것 같은 터널, 학교 담벼락에 핀 보라색 나팔꽃 등등. 가는 곳마다 내 어릴 적 엄마 손잡고 걸었던 어느 동네의 풍경이 불쑥 불쑥 나타났다. 저기 어디쯤 젊고 어여뻤던 내 엄마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깊은 그리움에 울컥한다. ‘엄... 마...!’ 순간 엄마 품에서나 맡을 수 있는 냄새와 기운이 온 몸을 감쌌다. 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엄마 껌딱지였던 그때의 내가 되어 내 아이 해인과 손잡고 걷는다. 언젠가는 해인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과 마주하겠지? 코끝이 찡하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작은 간판. 곰돌이 인형이 들고 있는 ‘open’이란 팻말을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작은 나무 액자들이 안내하는 대로 철재 계단을 올라가면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작은 놀이터가 있었는데, 봄가을에는 한쪽 구석에 앉아 계절이 가져다주는 냄새와 소리를 감상하며 책보면 좋겠다 싶었다. 그 옆으로 난 책방은 한 두 어른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작았다. 더위 속에서 길을 찾느라 땀 흘린 탓에 얼른 책방 안으로 들어갔건만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었다. 그냥 견디며 책들을 훑어보는데 한 번씩 불어오는 산바람이 참으로 상쾌했다. 산 속을 헤매다 마시는 한 잔의 약수 같다고나 할까.
원목으로 만들어진 서가에는 그림책과 함께 책의 주제와 연관된 소품, 미술도구, 인형까지 진열돼 있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여기에 작은 조명까지 더해져 도쿄의 어느 세련된 서점에 와있는 것 같았다. 문밖의 근대적 풍경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그림책의 면면을 보자니 베스트셀러 보다는 책방지기가 선별한 그림책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여름을 주제로 진열된 그림책들 중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 많았는데 해변을 끼고 있는 가마쿠라의 지역적 특성 때문인 것 같았다. <파도야 놀자>도 그런 이유로 선택된 것 같고. 책방지기에게 나와 해인을 소개하며 우리에게 좋을 만한 그림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곳까지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다소 흥분한 듯 그림책들을 선별해 주곤 페이지를 넘겨 가며 읽어 주기까지 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그녀의 손짓과 몸짓 표정에서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림책이기에 가능한 소통이었다. 예닐곱 권을 함께 보는 동안 처음의 어색함을 뚫고 서로의 마음에 친밀감이란 다리가 놓였다. ‘연결’이 된 것이다. 벅찬 감동을 느끼는 가운데 그녀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책방 홈페이지에서 누워서 책을 보는 아이 사진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그 아이인 것 같았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귀여웠다. 그녀가 두 딸의 엄마였다는 사실이 친근함을 더욱 키웠다. 추천해 준 그림책 중에 나와 해인이 한 권씩 고른 뒤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가슴에 어여쁜 추억 하나가 퐁당하고 떨어져 일렁였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은 '물건'이 아닌 '시간'.
책을 선택하는 시간
읽는 시간
그리고 그 앞에 계속 이어지는 시간.
그림책을 고르며 가지게 되는 모든 시간을,
작은 새 문고에서 소중히 다룹니다.
<코토리분코> 홈페이지에서 책방을 소개하는 글인데 가슴에 와 닿았다.
고쿠라쿠지역과 마을 → 그림책방 코토리분코 → 까페 요리도코로에서 점심 → 하세데라 절과 오르골당 → 고토쿠인 → 가마쿠라문학관 → 팝업 그림책 전문서점 메겐도르퍼 → 유이가하마 해변
* 그림책방 코토리분코(ことり文庫, KotoriBunko): 목, 금,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문을 연다. 고쿠라쿠지역에서 나와 오른쪽 아래로 7분간 걸으면 닿을 수 있다. 주소: 極楽寺1-4-12. Kamakura-shi, Kanagawa 248-0023 홈페이지: http://kotoribunko2525.wixsite.com
* 요리도코로(カフェ ヨリドコロ, Yoridocoro): 코토리분코 책방지기로부터 추천받은 곳. 코토리분코에서 계단으로 내려 오자마자 왼쪽으로 꺾어 10여분 가량 걸어 내려 오면 만날 수 있다. (영업시간은 주중 오후 6시, 토/일요일 오후 9시) 주소: 일본 〒248-0024 Kanagawa Prefecture, Kamakura, 稲村ガ崎1-12-16
* 하세데라 절과 오르골당: 하세데라 절(長谷寺)은 가마쿠라 시대 이전인 736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다. 가마쿠라에서도 빼어난 경승지로 꼽힌다. 정원은 회유식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산책할 수 있다. 오르골당(鎌倉オルゴ-ル堂)은 초입에 있다. 주소: 3-11-2, Hase, Kamakura-shi, Kanagawa Prefecture (최종입장 오후 5시)
* 팝업 그림책 전문서점 메겐도르퍼(メッゲンドルファー, Meggendorfer): 일반서점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팝업 그림책이 있는 독일식 목조 건물. 주소: 일본 〒248-0014 神奈川県鎌倉市 由比ガ浜2-9-61(오후 6시까지)
* 유이가하마(由比ヶ浜 / Yuigahama Beach )는 메이지 시대(1868~1912) 부터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에게 사랑받는 해수욕장이다. 유이가하마 해수욕장은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에도 등장하며,《침략! 오징어 소녀》의 배경(모티브)이 되기도 한 곳이다. 주소: 4 Chome Yuigahama, Kamakura-shi, Kanagawa-ken 248-0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