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한 특별한 일본살이
이와사키 치히로(岩崎 知弘, 1918~1974)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어느 날,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서 우선 도쿄에 있는 ‘치히로미술관’을 해인과 함께 찾았다. 그녀가 1952년부터 1974년까지 22 년 동안 살았던 집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은 도쿄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다소 외진 곳에 있다. 노란색 세이부신주쿠선(西武新宿線)을 타고 가미이구사(上井草)역에서 내려 건널목을 지나 가다보면 미술관 안내 표지판을 만날 수 있는데, 이 표지판만 따라가면 헤매지 않고 미술관에 닿을 수 있다. 한적하고 조용한 이 동네를 오가며 나처럼 외동아들을 키우고, 살림도 하고, 그림도 그렸을 치히로를 떠올리자니 가슴 한켠이 뭉클했다.
미술관에서 가장 먼저 보고팠던 곳은 ‘치히로의 아틀리에’. 살아생전 그녀가 사용했던 그림 도구와 노란색 물감으로 칠하다만 도화지가 고스란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손때가 묻은 작업실은 처음엔 빛바랜 흑백사진 같았다. 그러나 좀 더 보고 있자니, 작업실로 한 발만 들여 놓아도 43년 전 아니 65년 전 그녀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작업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던 해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란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다 더 이상 못 그린 거냐.’며 깊이 아쉬워했다. 아틀리에 건너편에는 꽃을 좋아하던 치히로가 직접 가꾸었던 정원이 있다. 이를 해인에게 설명했더니 정원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치히로의 아들 마쯔모토도 이랬겠지!
‘남편의 자살’, ‘인민신문기자’, ‘공산주의’, ‘반전, 반핵, 인권운동가...’ 이 표현들은 치히로의 삶이 얼마나 굴곡졌는지 보여주는 이력이다. 첫 번째 남편의 자살에 대한 죄의식과 일본이 동아시아 전쟁의 가해국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치히로는 평범한 삶을 이어갈 수 없었다. 결국 이전의 삶과 이별한 치히로는 속죄와 참회의 수단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참회가 깊을수록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커졌던 치히로는 평생을 어린이를 테마로 하여 만 여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치히로가 세상을 떠나자 '언제라도 치히로의 그림과 만날 수 있는 곳'을 바라는 팬들의 성원과 기부금, 그리고 치히로의 그림 인세로 미술관이 탄생됐다. 이는 1977년 당시 ‘그림책 작가에 대한 미술관’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그 후로 치히로미술관은 치히로의 원화는 물론 29개국의 173명의 그림책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의 원화 26,000점을 소장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그밖에도 치히로미술관은 어린이 그림책이라는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무엇보다 치히로미술관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치히로의 유언이 자국의 어린이는 물론 세계의 어린이, 지금의 어린이와 미래의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되는 것! 그로인해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세상을 구현코자 하는데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치히로미술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하면서도 고마운 선물이다.
아직도 끊이지 않는 전쟁과 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오늘날! 그림책과 이를 독자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보존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의미 있고 또 커다란 가치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림책 안에는 시대마다 작가의 깊은 고뇌와 성찰이 있고, 이를 반영한 꿈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치히로의 그림책과 미술관을 보며 깊이 깨달았다. 그림책을 보는 아이나 어른들이 많아지고, 이들이 책마다 담겨진 작가의 꿈과 희망을 발견하고 깊이 공감한다면, 세상은 보다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내가 해인의 엄마로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보다 명확해졌다.
“전쟁이라는 것은 집이 탄다거나 사람이 죽는 것 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좀 먹는다. 특히 문화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어찌 살아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끔찍한 세상.” 이렇듯 전쟁을 경험한 치히로는 ‘세계의 모든 아이들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며 이를 유언으로 남겼다.
* 참고: ‘치히로미술관’ 홈페이지와 ‘치히로미술관 30년’ 기념책
* 찾아가는 길: 〒177-0042 東京都練馬区下石神井4-7-2
(도쿄도 네리마구 시모샤쿠지이 4-7-2)
* 홈페이지: https://www.chihiro.jp/global/ko/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