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뫼르달 Apr 11. 2023

<안개>



그 섬에는 해변은 없고 자그마한 부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곳은 발자국을 남길 수 없는 곳이라고 고쳐 쓰자

바다가 몸을 움츠린 날이면 오래된 우물의 흔적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것은 오래된 사랑의 기록 정도라고만 하자

안개가 짙은 날에는 창문을 열 수 없었다 바다에서 태어난 안개를

집으로 들이는 건 터부와도 같았다 뱃사람들은 소주를 까거나

낡은 카드 뭉치를 가져와 포커를 치곤 했다 그들은

하트를 가장 높은 그림으로 쳐주었다


섬은 점점 메말라가는 중이었다 지난 여름 폐경이 온 여자는

양복쟁이들이 섬을 거세시켰기 때문이라고 지껄이며 침을 뱉었다



그리곤 창문 앞까지 드리운 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도배된 석회빛 벽면을 스크린 삼아 배설되는

자막조차 없는 오래된 프랑스 무성영화를 보듯,

거울을 보는 것보다 조금은 우아하고

적나라한 경멸의 과정이다

그 섬에 당신은 하나도 없고 길을 잃어버린 말들만 안개처럼

옷자락을 스칠 뿐이었다


바닷마을 사람들이 래그 타임의 대가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신이 파도의 싱커페이션을 겪어 본 일이 있다면


당신이 없이도 나는 여전히 변덕스럽다

바람이 거센 날에는 부두로 나가 파도의 맥을 짚으며

한참을 가만히 서있기도 한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을 마중하기 위해

불구가 된 섬을 등지고서

한참을 굶주린 짐승처럼 입을 크게 벌리면

발음할 수 없는 낱말들은

안개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첫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