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5
K에게,
여름이 오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정말 하루 이틀 사이에 갑자기 더워졌네. 어제까지만 해도 긴팔에 겉옷을 걸쳤는데 오늘은 다들 반바지 반팔 차림이다. 그래도 일교차가 아직 크니까 외출할 때 겉옷은 챙겨서 나가. 감기 걸리지 말고.
나는 오늘 불행에 대해 생각했어. 최근 들어 하필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한탄하게 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거든. 사소한 일부터 오늘처럼 비행기 연착으로 48시간 넘게 찬 바닥에 누워 기다리는 일까지 다양해.
예약한 자리에 앉았는데 내 자리만 청소가 안되어 있다거나, 길을 걷다 똥이나 껌을 밟는다거나 카페라테를 시켰는데 바닐라라테를 준다거나 뭐 그런 재수 없는 일들 있잖아. 그럴 때면 속으로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야?”라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험한 욕을 읊조리곤 해. 이런 일들이 가끔 일어나면 괜찮은데 운이 없는 날엔 이런 재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기도 해. 그런 날엔 세상에 대한 분노가 나 자신도 흠칫할 정도로 치솟아.
나는 그제 새벽부터 오늘 밤까지 LA공항에서 48시간이 넘도록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렸어. 원래 여정이 취소되고 다시 잡힌 여정까지 취소됐을 땐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어. 그냥 너무 힘들고 지쳐서 집에 가는 일을 포기하고 싶더라니까.
오늘처럼 불행이 나에게 돌진할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창피하게 눈물이나 짜내면서 온지구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스스로를 다독이겠지만 나한테 통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거야. 먼저 김광석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는 노래를 들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지쳐가는 의미 없는 나날을
두 손 가득히 움켜쥘 순 없잖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어린아이들의 가벼운 웃음처럼
아주 쉽게 아주 쉽게 잊을 수 있어
그다음에는 작은 생각을 최대한 크게 만들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래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우울해질 때 그 일에 매몰되지 않는 방법은 내가 속한 지구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안의 내가 얼마나 먼지처럼 작고 가벼운 존재인지를 생각하는 거야.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소리쳐도 지구는 무심하게 일정한 속도로 자전해.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봐. 이 일이 생사를 가르는 일인가? 100이면 100,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모든 짜증 나는 일은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든 우리 생사를 가르는 일은 아니야. 웃기는 말이지만 우리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는 신체적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 곧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는 거야.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되 내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은 깨끗이 놓아주는 거야.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기대하면서.
집 근처 익숙한 카페에서 시원한 아이스커피와 달달한 레몬 쿠키를 먹는 상상을 해. 빨리 씻고 침대에 눕고 싶어.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진짜로.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