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4
K에게,
며칠간 글 쓰는 일을 잊었어. 오랜만에 쓴다.
나는 그동안 잘 지냈어. 여러가지 일로 마음이 붕 떠있었지만 그래도 틈틈이 내 마음을 살피면서 간신히 살아냈어.
우울하고 불안할때 그 감정의 원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야. 나도 내가 왜 우울하고 불안한지 정확히 알지 못할 뿐더러 조금이라도 설명하려고 마음 먹으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혼자 열심히 생각 하다가 길을 잃곤 해. 입을 굳게 다물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긴 시간을 버텨.
우울은 마치 파도 같아. 규칙적으로 왔다가 다시 멀어지는 파도. 오는 것을 막을 수도, 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는 것. 왜 우울하냐는 질문은 왜 파도가 치냐는 질문과 같아. 파도는 계속 쳐왔고 앞으로도 칠 건데, 거기서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어느 날, 우울의 깊이가 너무 깊은 나머지 허우적 거리다 머리까지 잠겨서 숨을 쉬기 어려웠던 새벽녁. 몇 시간을 혼자 꺽꺽 울다가 너에게 전화를 했었지.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말문이 막혔어. 아무 일도 없는데 나는 왜 그럴까. 갑자기 억울해진 나는 너에게 화를 냈어. 너는 절대 이해 못할거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체 못할 울음이 다시 시작됐고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어.
너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너에게 미안하고 스스로가 창피해져. 슬픔, 외로움, 불안감은 나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너의 마음은 요즘 어떤지 물어보고 새벽 세시라는 말도 안되는 시간에 전화를 받아줘서 고맙다고, 내가 이 시간에 전화를 걸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뭘지 생각해. 한쪽으로 돌아누워 맞은편 벽을 멍하니 바라봐.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으면 가끔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 감정, 생각, 마음, 진심... 무형한 모든 소중한 것들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소리. 그 소리는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와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를 닮았어. 그 소리와 함께,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맥없이 펼쳐진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 모든 것을 움켜져야 하는데, 시간이 흐르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버리면 그렇게 멍하게 있는 시간이 1분에서 5분, 5분에서 10분이 돼.
멍하니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많아.
내일은 그런 시간들을 줄어보려고 해. 핸드폰도 줄이고, 누워 있는 시간도 줄이고.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고 믿고 싶어. 남은 시간은 너와 반짝이는 순간들에 대해 얘기하고, 너의 안부를 묻는 일에 더 쓰고 싶어.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