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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pr 27. 2019

산부인과는 왜 불편할까?

산부인과에서 마주치는 여성혐오에 대하여

산부인과는 참으로 기이한 곳이다. 산부인과는 여성을 위해 존재하는 곳인데, 산부인과만큼 여성혐오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도 흔치 않다. 청소년 때 생리통이 너무 심해 산부인과를 다녔던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여고생이 산부인과를 들락거리면 혹시라도 안 좋은 소문이 날까봐, 일부러 나를 다른 동네에 있는 산부인과에 데리고 갔었다. 여고생이건 여중생이건, 자궁이 있는 여성이 산부인과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미혼 여성에게 산부인과는 왠지 꺼림직한 곳이다. "성 경험이 있냐"는 의사의 질문(물론 진료를 위해서 당연히 필요한 질문일테다)에 어떤 대답을 하든 의사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성 경험이 있냐"는 질문은 "밀가루 음식을 자주 먹냐"는 질문과는 분명 다르니까. 아직까지 한국에서 미혼 여성의 성은 타인의 시선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다가 기혼 여성이 되면 좀 다른 종류의 여성혐오를 겪게 된다. 기혼 여성이 되면 더이상 "성 경험이 있냐"는 질문을 받진 않는다. 기혼 여성이 되면 관심은 온통 임신에 맞춰진다. 모든 의사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환자의 임신 문제에 대해서 섬세하지 못한 태도를 지닌 의사를 만날 때가 있다. 결혼을 하고 2년 쯤 되었을 때, 생리통 때문에 산부인과를 찾은 적이 있다. 남자 의사가 나에게 결혼한지 2년이 되었는데 왜 아직 아이를 낳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은 일 때문에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의사가 지금 본인의 나이가 그렇게 여유부릴 때는 아니지 않냐며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설령 그 의사 말이 맞더라도 그건 내가 나중에 오롯이 책임질 일이건만, 의사는 내 대답을 무시한 채 다음 달까지 애를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내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조금 극단적인 경험일지는 몰라도, 산부인과에서 생각보다 이런 종류의 여성혐오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꼭 의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내가 기혼여성으로서 산부인과에서 찝찝한 기분을 느낄 때는 많다. 산부인과에서 종종 남자를 씨앗, 여자를 밭에 비유하는 걸 들을 때가 있다. 임신을 하기 위해서는 씨앗도 밭도 건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우리 어머니 세대는 남자에게 '감히' 씨앗을 건강하게 가꾸라는 말도 못했을 텐데, 요즘은 임신을 여성과 남성 반반의 책임이라고 여기긴 하니 그 점은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얼핏 듣기에 남성의 정자가 자궁에 들어가 착상하는 모습이 씨앗이 밭에 뿌리내리는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찝찝한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찝찝한 기분의 근원 역시 여성혐오에 있다. 저 비유를 잘 살펴 보면, 어디에도 여성의 '난자'에 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임신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 자궁에 착상하는 과정을 뜻한다. 즉, 남성은 씨앗을 제공하고, 여성은 씨앗은 물론 밭까지 제공한다고 표현해야 맞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왜 여성을 마치 밭만 제공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일까?


'남자는 씨앗, 여자는 밭'이라는 표현에는 가부장제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다. 밭에 옥수수씨앗을 뿌리면 옥수수가 나고, 고추씨앗을 뿌리면 고추가 난다. 밭은 수확물의 품질은 좌우할 수 있겠지만, 제 아무리 비옥한 밭이라도 옥수수 씨앗에서 고추가 나게 하고 고추 씨앗에서 옥수수가 나게 할 수는 없다. 즉, '남자는 씨앗, 여자는 밭'이라는 표현에는, 아이의 핵심이 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아빠가 옥수수면 아이도 옥수수라는 것, 다시 말해 아빠가 '김씨'면 아이도 '김씨'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아이 유전자는 여성이 반을 결정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씨앗'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이처럼 임신을 둘러싼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역사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산부인과에서 여성혐오를 마주치는 일이 빈번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사소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여성들이 다른 병원보다 산부인과를 불편해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부인과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여성들의 성, 임신, 가부장제를 둘러싼 많은 사회적 억압들이 해소되어야 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인 산부인과가 진정으로 여성들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 나길 바라며.


* 산부인과에서 정말 섬세하게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들도 많이 만나 봤다. 이 글이 의사들 개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님을 다시한번 밝히고 싶다(내가 만난 몇몇 무개념 의사들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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