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보다 거미가 소름 돋는 이유
고등학교 때 장애아동 병원에서 봉사를 한 적이 있다. 봉사활동 점수를 채우기 위해서였지만, 평소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약간의 기대감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장애아동 서른 명 남짓이 생활하는 공간에 들어서니 불쾌함이 엄습했다. 그 공간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아이들이 흘린 밥풀 때문에 양말이 끈적해지는 것도 신경 쓰였다. 그때 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정신지체 아동이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 아이를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키가 내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아이였다. 하지만 아이는 장애 때문인지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었고 눈의 위치도 대칭적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다가올 때 내가 그 두 개뿐인 손가락을 뚫어지게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는 늘 ‘장애인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나와 너무 다르게 생긴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니 그런 생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아이의 이질적인 모습은 나에게 불편함, 더 나아가 두려움마저 불러일으켰다. 나는 봉사활동을 하는 내내 그 아이를 못 본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아이가 불편했던 이유는 순전히 나와 다른 겉모습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이런 경험은 자주 일어난다. 십년 전만 해도 지하철에 흑인이 타면 승객 모두가 쳐다봤다. 이제 외국인에게는 그러지 않겠지만 만일 지하철 옆자리에 얼굴에 문신이 가득한 사람이나 옷차림이 지나치게 이색적인 사람이 앉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 사람이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 자리를 옮기고 싶지 않을까?
심지어 이러한 감정은 인간이 아닌 동물을 볼 때도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포유류는 친근하게 생각하는 반면 양서류나 곤충은 징그럽게 여긴다. 곰과 거미를 생각해 보자. 실제로 마주했을 때 인간에게 더 위협적인 존재는 당연히 거미보다는 곰 쪽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곰 사진을 볼 때는 별 반응이 없으면서 거미 사진을 볼 때는 인상을 찌푸린다. 거미의 겉모습, 예를 들면 누르면 톡 터질 것 같은 검은색 몸통, 듬성듬성 털이 난 긴 다리, 광택 나는 여덟 개의 눈 등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곰은 실제로는 위협적인 존재일지라도 겉모습은 인간과 비슷한 구석이 많기 때문에 거미보다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차이는 어린이들이 곰 인형은 안고 자지만 거미 모형은 친구들을 놀래키는 용도로 쓰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가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이성적인 작용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숲에서 곰을 만나거나 길에서 마동석 같은 남성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 보자. 이때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경험 혹은 학습을 통해 야생동물이나 체격 좋은 남성이 우리를 공격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다섯 살 배기 장애 아동을 보고 뒷걸음질 치거나 손톱만한 거미를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둘은 곰이나 마동석처럼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실질적인 이유는 딱 하나다. 바로 그들이 우리와 ‘다르게 생겼다’는 점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질적인 존재를 마주쳤을 때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이와 같은 감정을 ‘이질감’이라고 한다. 이질감은 상황에 따라 징그러움, 불쾌함, 불편함, 두려움 등 여러 가지 감정으로 표출된다. 예를 들면 거미를 보면 소름이 돋는 것, 동성끼리 키스하는 장면을 보면 불쾌한 것, 외국인이 옆자리에 앉으면 마음이 불편한 것, 장애 아동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 등은 모두 다 이질감의 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질감’은 부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감정이지만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점이다. 거미를 보고 징그러워하는 아이를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시골 마을에 처음 외국인이 등장했는데 힐끔거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만일 이질적인 존재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질감’은 나와 다른 존재를 마주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는 부정적인 감정인 반면, ‘혐오’는 나와 다른 존재를 의식적으로 경멸하고 차별하고 미워하는 행위이다. 단어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 ‘이질감’은 ‘느껴지는’ 것, 즉 수동적인 감정이고, ‘혐오’는 ‘하는’ 것, 즉 능동적인 행위이다. 얼핏 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거미를 보고 징그럽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우리가 거미혐오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거미를 혐오했다면 지금쯤 전국의 거미들은 다 박멸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유대인은 거미처럼 다리가 8개 달린 징그러운 존재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매우 적극적으로 유대인을 경멸하고 차별하고 미워했다. 이를 보면 ‘이질감’과 ‘혐오’는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게 뚜렷해진다. ‘혐오’는 분명 ‘이질감’에서 출발하지만, ‘이질감’이 ‘혐오’가 되기 위해서는 몇몇 사회적 과정이 더해져야 한다. 그 사회적 과정을 파헤친다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파괴적인 사회 현상으로 변모하는 고리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혐오’와 그 발생 과정에 대해서는 연재 중반부터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은 ‘이질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앞서 이야기했듯 이질적인 존재를 마주했을 때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도 이러한 이질감을 완화할 방법이 있다면 이 또한 사회의 혐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질적인 존재를 마주쳤을 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