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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Feb 08. 2022

죽음에 대하여

“왜 죽음에 대해 나이브하게 생각하지?”


함께 간 여행에서 스승이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스승의 눈빛에서 절박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서일 것이다. 며칠 전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는 건.


한 친구의 죽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의 죽음은 3인칭의 죽음이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같은 아파트에 오래 살아서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 하는 사이. 친구보다는 지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관계. 가끔씩 엄마를 통해 그 아이의 소식을 마치 연예인의 소식 듣듯 들어왔을 뿐이다. 같은 초등학교 동창이랑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얼마 후 이혼을 했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엄마와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그 아이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엄마, 준호(가명)는 잘 산대?” “혜원아, 준호 죽었어.”


황당했다. “죽었다고? 자살했어?” 그건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원체 별 걱정 없이 살던 아이라 아마 자살보다는 사고사일 것 같다고 했다. “부모님은?” “아버지 사업 다 접고 은퇴하셨대.” 준호네 아버지는 미디어에 행보가 보도될 만큼 사업을 크게 하던 분이다. 준호가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는 비즈니스 미팅 때문에 매일 저녁을 세끼씩 드신다는 이야기를 한 게 기억난다. “그렇구나.” 엄마와 차에서 나누었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3인칭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스승과 여행을 다녀온 뒤, 그의 죽음이 자꾸 생각난다. 나의 죽음과 너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나의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철학을 한 뒤 생긴 버릇이다. 사고사로 한방에 죽을 수도 있지만, 만일 시한부 판정을 받아 삶을 돌아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후회할지 생각해본다. 그러면 내가 지금 주저하고 있는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만일 한 달 뒤에 죽는다면 나는 어떨 것 같나. 지금의 나라면 백 퍼센트 후회할 것 같다. 병신같이 겁먹어서 주저하고 고민하고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안 하느라, 나에게 주어진 이 선물 같은 삶을 제대로 맛보고 누리지도 못하고 뒈지는 게 너무 후회될 것 같다. 선물을 받아서 평생 장롱에 잘 모셔두다가 이제 한 번 포장지를 뜯어볼까 하는 참에 누가 가져가버린 느낌이 들 것 같다. 스승은 죽을 때 “여한 없이 살고 간다.”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졸라 여한이 많을 것 같다. 그게 내가 유쾌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다.


몸과 마음이 충만해지는 사랑 한 번 못해보고 죽을 거야? 세상에 내가 진짜 느끼고 생각하는 거 한번 외쳐보지도 못하고 죽을 거야? "사실은 이런 거 아니야? 사실은 너도 그런 거 아니야?" 이런 거 한 번 제대로 말해보지도 않고 그냥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래? 맨날 내가 사랑을 받나 못 받나만 나노 단위로 신경 쓰느라 사랑하는 사람의 진짜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그런 찐따로 계속 살래? 이것도 무섭고 저것도 무서워서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주저앉아 허송세월 보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는데’라고 후회하는 사람이 될래? 지금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렇게 후회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도대체가 삶을 누릴 생각이 없으니까. 삶을 충분히 누려야만 여한이 없을 것 아닌가.


젊은이의 오만은 자기가 오래   안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오래 살까? 그렇지 않다. 생각보다  주변에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죽음을 쉬쉬하기 때문에,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기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사람은 죽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죽는다. 죽음을 등에 지고 사는 사람만이 삶을 소중히 대할  있다.




‘나는 왜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까?’


최근에 계속 나를 붙잡고 있던 화두였다. 나는 모지리다. 스승이 모지리들만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모지리들만 후회하고 산다고 했다. 나는 후회하고 산다. 나는 소진하기 않기 때문이다. 왜 소진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만, 여전히 내가 한 달 뒤에 죽을 수 있다고 ‘진짜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죽음’뿐만 아니라 ‘너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소중한 이를 소중히 대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준호의 아버지가 자꾸만 생각났던 거다. 준호 아버지는 아셨을까. 준호가 이렇게 빨리,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크기는 그가 부재했을 때의 고통의 크기로 잴 수 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고통을 나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은퇴했다는 그 짧은 말에서 그의 회환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이가 영원할 거라고 자만했던 이의 회환이.


나의 죽음. 너의 죽음. 너-나의 죽음. 내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 네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관계도 언제라도 끝날 수 있다는 것.


끝이 있기에 지금이 소중하다는 것.


나의 죽음을 생각해본다. 나는 후회할 것이다. 더 즐겁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할 것이다. 나에게 죽기 전까지 한 달 정도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까 생각해본다. 나는 소중한 이들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죽을 때가 되니까 인생 정말 별 거 없다고, 너는 부디 너에게 주어진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살라고, 그래서 나처럼 병신같이 죽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잘 살다가 간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온 마음을 꾹꾹 눌러 편지를 쓸 것이다. 나는 왜 사랑의 역량이 없을까. 그건 내가 저 말을 나에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저 말을, 나는 진짜로 뒈질 것이기 때문에 내 삶을 전부 담아 할 수 있는 저 말을, 드디어 무게를 갖게 된 저 말을, 정작 나에게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삶에는 무게가 없다. 나는 영원히 살 것이라 생각하니까. 사랑의 크기는 그 사람의 부재의 고통으로 잴 수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무게는 죽음의 고통으로만 잴 수 있다. 아니, 죽음의 고통은 느낄 수 없으니, 죽음을 직시하는 고통으로만 잴 수 있다. 그래서 힘들고 괴로워도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딱 그 만큼의 고통만큼 삶에 무게가 생길 테니까.


나는 이제 찐따처럼 살고 싶지 않다. 죽을지 몰랐어? 이별할지 몰랐어? 다 알고 있었으면서, 꼭 끝이 돼서야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건 모지리의 삶이다. 나는 모지리로 살기에는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는 누리고 살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 말해줄 것이다. 너도 누리고 살아. 삶은 선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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