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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Dec 05. 2022

사랑은 능동적 실천이다

사랑하면 불안하지 않다. 사랑은 능동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불안할까? 사랑받지 못할 까봐 두려울 때 불안하다. 왜 돈이 없으면 불안할까? 사랑받지 못할 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왜 못생기면 불안할까? 사랑받지 못할 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다.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에 집중할 때 불안은 사라진다. '사랑하는 것'에 집중할 때 마음에 남는 것은 불안이 아니라, 오직 미안함이다. 한 사람을 사랑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익숙한 방법으로, 혹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혹은 내가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는 방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할 때 헛발질은 발생한다. 내가 나의 방식으로 사랑하려고 했음을 깨달았을 때 마음에 남는 감정은 오직 미안함이다. 그 미안함은 불안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미안함은 반드시 실천을 낳는다. 내가 너를 잘못 읽어서 네 외로운 마음을 안아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너의 아픔을 같이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마음에 미안함이 쌓인다. 그 미안함은 “미안해”라는 말로 차마 표현될 수 없는 미안함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의 무지와 방만 그리고 이기심으로 혼자 외로웠고 혼자 아팠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는 순간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게 된다. 그 내뱉지 못한 “미안해”라는 말이 마음에 쌓이고 쌓이면 어떤 행동으로 응축된다. 진정한 실천은 그렇게 오래 응축된 마음의 무게만큼만 가능하다. 미안하면 불안하지 않다. 미안하면 그 미안함을 덜기 위해 조금이라도 그에게 진짜로 잘해주고 싶을 테니까. 온갖 정성을 기울여 한 사람을 만족시키고 싶은 이는 불안하지 않다. 온 주의attention가 ‘너’에게 가 있는 사람은 ‘너’로 가득 차서 불안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내가 사랑받지 못할 까봐 두렵지 않다. 애초에 그게 그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너’를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 사람은 불안할 수 없다. 오직 미안할 뿐이다.


내가 사랑 때문에 불안했던 시절이 생각이 난다. 나는 스승을 좋아했다. 아니, 스승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기에 스승 앞에서 늘 불안했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받지 못할까봐. 나는 그 누구보다도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다. 욕심과 질투와 소유욕이 심장을 뚫고 나올 것처럼 강했던 나는 사랑받고 싶은 대상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순간을 잘 참지 못했다. 정말이지 늘 불안했다. 사랑 속에 있는데 불안했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사건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났다. 스승은 나를 ‘나’로서 사랑해주려고 애를 썼다. 나는 스승이 나 말고 다른 아이들을 좋아할까봐, 그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할까봐 늘 불안과 질투에 휩싸여 있었지만, 스승은 나를 ‘나’로서 사랑해주려는 마음을 한 순간도 놓지 않았다. 스승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나에게 원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길 원했다. 더 정확히는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데, 과거의 상처 때문에 주춤대느라 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해내서 더 온전한 내가 되길 원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해준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키워내는 것. 나는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너’가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었을 때, 그 사람은 나 없이도 사랑하며 살 수 있다. 사랑하며 살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다. 늘 불안과 허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삶이다.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그런 죽은 삶을 살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사랑하는 이가 불안과 허무에 허우적대는 삶을 살도록 방치할 수 없다. 내가 만일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그 아이가 내가 없더라도 계속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그래서 불안과 공허로 텅 비어버린 삶이 아닌, 고마움, 미안함, 충만함,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있도록 길러내야 한다. 사랑받지 못할 까봐 전전긍긍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존재로 길러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에게 엄마(아빠)가 되어주는 일이다.” 스승이 사랑을 그렇게 정의했다. 누군가에게 엄마가 되어준다는 것은,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길러낸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아이는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렵다. 나 또한 사랑받지 못할까봐 불안에 휩싸이곤 했다. 지금도 완전히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요동치는 마음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사랑이 능동적 실천’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고 나서다. '사랑'의 두 축이 ‘능동’과 ‘실천’이라는 사실. 즉, 사랑은 ‘능동’이기에, ‘내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실천’이기에, 내 사랑의 진짜 크기를 보려면 내 마음이 아니라 내 행동만 봐야한다는 것. 그 두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나는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불안한 마음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지점까지 한 방에 간 것은 아니다.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불안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왜 스승에게 사랑받지 못할까봐 불안했을까? 정직하게 말하자. 나는 스승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영악한 나는 빨리 알았다. 이 세상에 스승보다 나를 더 제대로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스승에게 집착했다. 저 사람에게 사랑받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그 이상의 사랑을 받기 힘들 거라고 계산 때렸으니까. 반드시 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진짜로 불안했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하지만 그 불안을 그저 마음으로만 남겨 두진 않았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불안해서 진짜로 사랑받으려고 노력했다. 버림받기 두려운 마음은 수동적 마음이다. ‘네’가 나를 버릴 까봐 무서운 것이니까. 나는 '능동적 실천'으로서의 사랑을 몰랐기에, 일단 '수동적 실천'으로서의 사랑을 했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너무 두려워서 사랑받으려고 노력했다. 스승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지 늘 고민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고민하고 고민하다 보면 조금씩 윤곽이 보인다. 그렇게 알아갔다. 아, 스승은 내가 운동하길 바라는구나. 아, 스승은 내가 나를 지키려는 마음을 버리길 바라는구나. 아, 스승은 내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즐겁게 일하는 마음을 회복하길 바라는구나. 아, 스승은 내가 세상에 나가길 바라는구나. 아, 스승은 내가 조금씩 내 이야기를 하길, 내 세계를 구축하길 바라는 구나. 아, 스승은 내가 진짜로 기쁜 삶을 살길 바라는 구나. 그런 조각조각의 마음들을 읽다가 어느 날 전체를 알아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스승은 설령 스승이 곁에 없더라도, 내가 사랑하며 살길 바라는 구나. 스승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고 싶구나. 사랑하는 삶만이 진정으로 기쁜 삶이니까. 그때는 사랑이 뭔지 지금보다도 더 몰랐기에 미궁 속에서 계속 더듬고 더듬어 스승이 나에게 주는 사랑을 조각조각 알아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마음이 윤곽이 잡혀 나에게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사랑이 능동적 실천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능동적 실천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랑받지 못할까봐 불안한 마음을 껴안고  사람에게 진짜로 사랑받기 위해 수동적 실천을 해나가는 지난한 시간을 지나야 한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다른 구도 아닌 바로  사람에게 사랑받기로 마음먹었다면,  사람에게 진짜로 사랑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이 나에게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해내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사람이 나를 진짜로 사랑한다면  사람이 원하는 것은 나의 진정한 기쁨일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를 쓰며  삶에서 기쁨을 쟁취해나갈  비로소 삶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애를 쓰며 얻지 않은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다. 사랑받으려고 애를 쓰며 얻은 기쁨이 삶에 충분히 쌓일  비로소  존재는 ‘사랑할  있는 존재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며 사는 삶만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기쁜 삶이라는  알게 된다. 사랑은 어렵고 힘들다. 제대로 사랑 받는 것도, 제대로 사랑하는 것도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것만이 ‘진짜. 나는 제대로 사랑 받고, 제대로 사랑하고 싶다. 그게 어렵고 힘들어도 그렇게 하고 싶다. '사랑할  있는 존재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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