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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던 날의 위로

by 소향

어떤 날은 특별한 일이 없다.
출근 시간에 맞춰 알람이 울리고, 익숙한 길을 따라 걷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습관적으로 몸이 움직인다. 그저 루틴처럼 눈앞의 업무를 처리하고, 메신저 알림에 반응하고, 점심시간이면 습관처럼 같은 식당을 향한다. 커피를 마시며 숨을 고르고, 오후엔 조금 졸리고, 퇴근 무렵엔 별다른 감흥 없이 일과를 정리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다.
말 그대로 무던하고, 무탈한 하루다.

그런데 그런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가끔, 이상할 만큼 고맙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건도, 기쁨도, 불행도 없이 흘러간 하루를 누군가는 ‘의미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평온함이 어떤 이에게는 위로가 된다. 감정이 들끓지 않고, 상황이 요동치지 않고,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하루이기 때문이다. 숨 고를 틈을 내어주는 하루 쉼의 하루인 것이다.

바쁜 하루 속에서 가장 가볍게 지나치는 것은 일상이지만, 가장 깊은 힘을 지닌 것도 역시 일상이다. 매일 반복된다는 이유로 소중함을 잊게 되지만, 실은 그 안에 담긴 안정감이야말로 삶의 균형을 지탱해 주는 축이다. 목표를 달성하지 않아도 괜찮고, 특별히 기쁘거나 슬프지 않아도 충분한 날들이다. 그저 숨 쉬며 지나갈 수 있는 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꽤 많은 걸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위로는 늘 드라마틱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택배 상자의 완충제처럼, 말없이 공간을 채워주는 것이 진짜 위로가 된다. 말보다 묵음, 감정보다 조용한 안정감 같이 말이다.
누군가의 걱정보다, 조용히 내 자리에 놓여 있는 따뜻한 물 한 컵이 그런 것처럼. 친절한 조언보다, 굳이 묻지 않고 곁을 지켜주는 사람의 존재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없던 하루에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다정함이다.

사람들은 흔히 ‘별일 없었어?’라고 안부를 묻는다.
그 말은 어쩌면 ‘다행이야’라는 말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사건 없는 하루를 무사함으로 여기는 것, 그 평범함이야말로 어떤 이에게는 간절한 희망일 수 있다.
감정을 일으킬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아무 일도 없는 하루는 깊은숨처럼 소중하다.

살면서 진짜 지치는 날은 거대한 고비보다 사소한 무게가 누적된 날들이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엔 애매한 마음들이 머리를 시끄럽게 한다.
지친 것도 아니면서 지쳤고, 슬픈 것도 아니면서 허전하고, 기쁜 것도 아니면서 괜히 웃음이 나온다.
그럴 때 무거운 위로는 오히려 짐이 되기도 한다.
가벼운 인사 한마디, 창밖의 바람,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빛 하나가 더 깊이 스며든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던 날의 위로는 특별하다.
말없이 다가오고,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소란스럽지 않아서 오래 남고, 조용해서 더 깊이 각인된다.
그날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 귀하게 느껴진다.

그런 하루가 쌓여 마음의 그늘을 덜어내고, 무너진 균형을 되돌리며, 다시 내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누군가와 나눈 긴 대화도 좋지만, 말없이 나란히 걷는 산책길이 더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와 같은 일상의 순간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다행인 날들이다.
우리는 그런 평범함 속에서 회복되고, 다시 다정해진다.

삶은 매번 변화를 요구하지만, 어떤 날은 변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그저 조용히 하루가 흘러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은 셈이다.
눈에 띄지 않아도, 기록되지 않아도, 말할 일이 없어도, 그런 하루는 분명 의미 있다.
그 의미는 나중에 알게 된다.
힘들었던 하루를 견뎌낼 때, 그 아무 일도 없던 날이 나를 잡아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이 조용한 하루를 애써 붙잡아본다.
별일 없이 지나가는 날들이, 부디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날들이 나를 지탱한 온기였음을, 뒤늦게라도 알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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