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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마음을 놓고 왔다

by 소향

어떤 장소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늘 가던 길이었고,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곳을 생각하면 괜히 마음 한쪽이 젖어온다.
별다른 사건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오래 남는 기억이다.
그 자리엔 어쩌면, 다 하지 못한 말이나 미처 챙기지 못한 감정이 그대로 놓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늘 움직이는데 마음은 가끔 뒤처진다.
몸은 계절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데 마음은 여전히 어느 장면에 머물러 있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고, 생활은 달라졌는데, 문득 어떤 장소를 스치면 그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건 아마도 무심히 흘려보낸 감정이 그 자리에 눌러앉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매일 지나던 계단에 잠시 앉았던 적이 있다.
비가 오고 있었고, 우산을 챙기지 못해 난감해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누군가 내민 우산 하나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지만, 그날 계단에 남은 건 단지 비에 젖은 발자국만은 아니었다.
감사하다는 한 마디로 충분하지 못했고, 그 순간에 생각이 짧기도 했기에 얼렁뚱땅 넘어간 것 같았다.
지금 비는 그쳤고, 길은 말랐지만, 그 마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심코 떠난 어떤 자리에는 늘 뭔가가 남는다.
말하지 못한 안부, 끝내 건네지 못한 손길, 망설임에 꺼내지 못한 사과, 혹은 꾹 눌러 담은 눈물 같은 것들이다. 그 순간에는 그저 지나쳤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마음을 불러 세운다.
“그때 조금만 더 머물렀더라면.”
“조금만 더 천천히 걸었다면.”
“한마디라도 더 했더라면.”
그 아쉬움이 마음의 무늬처럼 남는다.

살면서 종종 그런 경험을 했다.
마음이 따라오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버리는 일처럼 말이다.
지금은 멀리 떠나온 장소인데 어쩐지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안쪽이 저릿해지는 이유가 있다.
한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공간이 어느 날엔 깊은 여운을 품은 기억으로 돌아온다.
그때 제대로 받아주지 못한 감정이, 시간이 지나 나를 다시 찾아온다.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놓고 다닌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 무뎌진 줄 알았던 기억, 다 지나간 줄 알았던 관계까지 말이다.
그러나 마음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그래서 때로는 아무 일 없는 장소가 가장 많은 감정을 품고 있다.

그 자리에 마음을 놓고 왔다.
당시엔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곳에는 머물러 있는 나의 한 조각이 있다.
그 조각은 지금도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때론 용서를, 때론 인사를, 때론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제 와서 무언가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애써 외면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그 자리를 다시 지날 때, 잠시 멈춰 서서 그때 미처 건네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열어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놓고 온 마음을 다시 되찾을 수는 없어도, 그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가벼워진다.

그렇게 마음은 천천히 따라온다.
비워둔 자리로 돌아오고, 잊은 감정에 다시 손을 얹고, 놓친 순간에 의미를 더한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때 그 자리에 놓고 온 마음이 나를 다정하게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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