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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은 지나간 뒤에야 보인다

by 소향

다정이라는 건 참 이상한 감정이다. 가까이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못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햇볕 아래서 그림자가 보이지 않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며든 온기라는 건, 때로는 떠나간 자리에서야 비로소 또렷해진다.

전에 함께 일했던 선배가 있다. 성격은 깐깐했고, 말투는 늘 딱 잘라서 예스와 노를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회의 자리에서 틀린 건 틀렸다고 했고, 말이 안 되는 주장에는 정색을 하며 반박했다. 유쾌하거나 친절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실력 있고 정확했다. 나는 그가 조금 불편했다.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와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점심시간에 조용히 내 옆자리에 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인다.”
나는 당황했고, 뭔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괜찮습니다.”라고 짧게 답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리하지 마시게”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말은 퇴근길에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무심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그때 적지 않은 위로받았다.

그 후로도 그의 무뚝뚝함은 여전했고, 회의에서도 변함없이 냉정했다. 하지만 그가 가끔씩 건네는 말, “식사는?”, “잠은 좀 자나?” 같은 일상적인 물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다정함을 앞세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늘 중요한 순간에 그렇게 곁에 있었다.

결재가 지연돼 애가 타던 날, 그는 내게 아무 말 없이 필요한 서류를 대신 챙겨 처리해 줬다. 누가 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다른 팀에서 그가 도와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도 나는 고맙다는 말을 제때 하지 못했다. 어색했고, 괜히 쑥스러웠다.

그가 퇴직을 앞두고 내게 명함 하나를 건넸다.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해.”

그가 떠난 후, 그의 빈자리를 내가 채우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있어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가 했던 수많은 ‘작은 일들’을 말이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업무를 챙기고, 누군가를 은근히 배려하고, 후배들 실수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감싸주던 그의 배려를. 그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다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다정함을 착한 말투, 부드러운 표정, 밝은 분위기에서 찾는다. 하지만 진짜 다정은 의외의 곳에 숨어 있다. 정확한 피드백, 뼈 있는 한마디, 그리고 뒤에서 묵묵히 메운 빈틈 속에 있다. 때론 날이 서 있는 사람일수록, 안으로는 더 깊이 다정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당장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직장이라는 구조 안에서는 더 그렇다. 감정보다 일, 관계보다 결과가 먼저인 곳에서는 누군가의 다정함이 오해되기도 쉽다. 그가 내게 했던 행동들은 그 시절엔 그냥 ‘책임감 있는 선배의 태도’쯤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지금 내가 후배에게 같은 방식으로 다가서려 할 때마다 문득 그가 떠오른다. '아, 그건 책임이 아니라 다정이었구나' 하고 말이다.

다정은 가끔, 그 사람이 사라진 뒤에야 보인다.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어느 날 그 사람의 말투와 습관이 내 삶에 남아 있다.
조용히 영향을 주고, 천천히 동화되어 간다.

나는 가끔 그에게 연락을 한다. 지금도 그는 예전처럼 말이 많지 않다.
“잘 지내?”
“그럭저럭요. 선배는요?”
그 짧은 대화 끝에 늘 붙는 말이 있다.
“필요하면 말만 해.”

여전히 그는 다정하지 않은 말투로 다정한 말을 남긴다.

그렇게 다정함은 지나간 뒤에 보이는 것이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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