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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에게 길을 묻는다

by 소향

햇살은 눈부신 시간을 데려온다. 그 밝음은 무언가를 보이게 하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게 한다. 너무 밝으면 눈을 감게 되고, 너무 환하면 그림자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림자는 빛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항상 곁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다. 어떤 감정이나 어떤 기억처럼 말이다.

길을 걷다 보면, 발밑에 붙어 있는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바쁘게 걷는 동안엔 인식조차 하지 못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출 때, 조용히 따라와 있던 그림자와 눈이 마주친다. 몸의 방향에 따라, 시간의 각도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그 어두운 자국은 마치 삶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그림자는 항상 침묵으로 존재를 이야기한다. 말이 없고, 감정도 없지만, 어쩌면 가장 정확하게 마음의 방향을 알고 있는 내비게이션과도 같은 것이다. 겉으로는 웃으며 걸을 때조차도, 뒤따르는 그림자는 아무 말 없이 그 웃음 뒤의 아픔을 알아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는 늘 진심의 가장자리에서 출발한다.

어떤 날의 그림자는 유난히 짧고 선명하고, 또 어떤 날은 길게 늘어진다. 밝은 햇살 속에서도 희미하게 번지는 날이 있다. 삶도 그렇게 닮아간다. 누구나 가볍고 선명한 날을 원하지만, 자주 길게 늘어지고 희미하게 흔들리는 날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그림자는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가깝게, 발끝 아래서 단단히 붙잡고 있다.

기억도 그림자와 닮아 있다. 잊었다고 믿은 기억이 어느 오후, 아주 사소한 냄새나 풍경에 의해 불쑥 떠오른다. 누군가의 뒷모습, 오래전에 들었던 노래 한 구절, 지나가는 말 한마디처럼 말이다. 그런 순간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잊으려 애쓴 기억일수록 더 선명하게 떠오르고, 억누르던 감정일수록 더 크게 흔들린다. 그림자는 그런 것들을 고요히 담고 있는 그릇이 된다.

햇살이 강해질수록 그림자는 진해진다. 삶의 무대가 화려해질수록 마음속 어둠은 더 짙어진다. 누군가의 겉모습이 빛나 보일수록 그 이면엔 감추어진 불안과 외로움이 있다. 그림자는 바로 그런 이면을 따라 걷는 것이다. 감춰진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그냥 거기에서 함께 머물고 있다.

그림자는 존재에 대한 가장 조용한 반응이다. 누구에게도 소리를 내지 않지만, 늘 곁에 있고, 늘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그 무심한 충실함으로 위로를 받는다. 사람보다, 말보다, 더 오래 남는 위로를 말이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어 준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히 위로가 될 테니까.

어둠 속에서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조명을 끄고, 시끄러운 소리를 꺼낸 뒤, 비로소 그림자는 마음속에서 다시 선명하게 피어난다. 그 어둠은 외롭지만 동시에 필요한 시간이다. 모든 것이 멈춘 밤,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면, 그날의 그림자가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온다.

그림자는 거울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이나 상황을 반사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아서가 아니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더 정직한지도 모르겠다. 거짓 없는 자세로 하루를 함께 걷고 누군가의 마음 곁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고 있다.

살다 보면 길을 잃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기 어려울 만큼 모든 게 막막해지는 순간 말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빛을 찾아 헤맨다. 새로운 길을 밝혀줄 불빛이나 누군가의 말, 위로의 문장들 같이 방향을 알려주거나 위로를 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 발밑의 그림자에게도 길을 한 번 물어보자.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던 존재에게서도 대답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앞서 가지 않는다. 늘 한 발 늦게 따라온다. 뒤에서 보이는 풍경은 전혀 다르다. 앞서 걸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뒤늦게 따라오는 그림자의 시선에서는 명확하게 보인다. 조급한 마음도, 두려운 감정도, 애써 무시했던 상처도. 그 모든 것들을 지나서야 비로소 마음은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빛은 눈을 감게 하지만, 그림자는 눈을 뜨게 한다.
보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늘 곁에 있으면서도 침묵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위로인지
이 글을 쓰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림자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깊다.
어떤 관계보다 오래 남는다.

때로는 위로가 필요하고, 때로는 삶의 이정표가 필요한 순간이 올 때, 언제나 반 발짝 뒤에서 따라오는 조용한 그림자의 존재는 누군가의 소중한 하루를 완성해 주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가장 좋은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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