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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못한 시간을 건넜다

by 소향

새벽 네 시, 아직 어둠이 이마를 짚고 있을 무렵 도시의 표정은 무채색이다. 시곗바늘이 틱, 하고 넘어가는 소리조차 숨죽인 채 머물고, 창문 너머 바람의 그림자조차 바닥에 스미듯 내려앉는다. 그 고요는 말이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안고 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마음,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시간을 꺼내 드는 새벽은 그 시간만이 허락하는 어떤 깊이 있는 포옹이다.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닌데 가슴 한편이 조용히 젖는 날이 그렇다.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제시간에 도착한 하루였지만, 어쩐지 마음은 먼 길을 돌아온 듯 지쳐 있는 날이 있다. 낯선 골목의 모서리, 오래된 벤치 한편, 누군가의 발자국이 사라진 먼지 위에서와 같은 날이면 문득 걸음을 멈추게 된다. 말은 없지만 마음이 고개를 드는 시간이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그러나 가장 내 마음에 가까운 그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마음이란 자주 늦게 도착한다. 지나간 후에야 무언가로 남는다. 환하게 웃던 얼굴이, 무심한 인사 한마디가, 전하지 못한 말들이 시간을 건너 다시 나를 부른다. 그 순간은 작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느끼곤 한다. 어떤 감정은 희미해졌지만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가끔, 오래된 사진을 들춰본다. 빛이 바랜 얼굴들, 엷은 주름처럼 종이 위에 스며든 시간들이 보인다. 그 안에서 웃고 있는 내가 낯설고 동시에 애틋하다. 그 시간이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그 웃음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그때는 왜 몰랐을까. 기억은 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의미를 완성한다. 그래서 다정함은 멀어져야 더 또렷해진다.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그 순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은 늘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마음은 늘 그런 방식으로 남는다. 특별하지 않았던 풍경이 문득 그리워지고 매일 지나쳤던 거리의 냄새가 어느 날 낯설게 가슴에 들어온다. 잊은 줄 알았던 일이 다시 손끝에 닿고 놓은 줄 알았던 사람이 문득 눈동자 안에 어른거린다. 마음은 잊지 않는다. 다만 묻어둘 뿐이다. 그리고 그 묻어둔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나 기억을 건넨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오래된 장소를 걷는다.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이 있었던 곳도 아니다. 다만, 그 자리에 나의 시간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사람의 얼굴이 바뀌어도, 그곳엔 여전히 나의 일부가 머물러 있다. 마음은 그렇게,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보이지 않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것을 지나친다. 사랑, 이별, 약속, 침묵, 고백. 그 모든 감정의 잔향이 마음 안에 차곡히 쌓여간다. 눈에 보이지 않고 이름 붙여지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과 같이, 그 감정들은 종종 말보다 강하고 기억보다 선명하다. 어느 날 불쑥 떠오르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가슴 한쪽을 적시기도 한다. 그렇게 아무도 보지 못한 시간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지탱한다.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큰 사건이나 극적인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지나간 조용한 시간들이다. 말없이 흘려보낸 하루들, 잊힌 듯 쌓인 마음들, 되돌아볼 틈 없이 건너온 그 무수한 날들이 오늘의 나를 이루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눈부시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그 모든 시간은 내게 가장 정직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더 오래 남아 있다. 전하지 못한 감사, 끝내 꺼내지 못한 사과, 마주하지 못한 작별이 모두 그렇다. 그런 감정들은 완결되지 않은 채 어딘가에 머무르며, 언젠가 다시 우리 앞에 선다. 그때가 돼서야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하루를 건넌다. 특별한 일도, 인상적인 대사도 없는 하루지만, 마음이 고요히 따라오는 날이다. 거기에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고 싶은 순간들도 있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내 안에 오래 머물렀던 시간과 다시 마주한 날이 온다면 그 모든 시간이 내게 묻겠지. “그때, 넌 정말 괜찮았니?”라고.

그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 이 하루를 조용히 마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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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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