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정들어 떠나지 못하겠다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집에 정이 들어 떠나기 싫다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그렇다면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아파트와 달리 왜 집에 정이 드는 것일까? 아파트는 정이 가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는 완성된 공간이다. 입주를 하면 딱히 손을 봐야 할 일들이 거의 없다. 반면에 주택은 다르다. 새로 지은 집이건, 오래된 집이건 주인의 손길을 부른다. 그러니 주택에는 손때가 묻어나는 것 같다. 그 손때가 시간에 숙성되어 발효되는 것이 정인가보다. 아파트는 사용하는 집이라면 주택은 고치며 살아가는 집이다.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내 취향에 물들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정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재미가 주택에 사는 맛이 아닐까 싶다.
지난 12월, 잘 돌아가던 냉장고가 갑자기 고장이 났다. A/S 신청을 하고, 기사님이 방문을 해서 점검을 하더니 수리가 어려운 상태라 사용을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냉장고를 회수하면서 보증 10년에 미달된다며 절반의 금액을 환불해 준다고 했다. 졸지에 냉장고 없이 살아야 하는 시대를 역행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옆지기와 대리점으로 달려가 제품을 주문했지만, 주문이 밀려 2주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1월부터 사무실과 제휴 할인 행사가 있었기에 주문을 취소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냉장고 없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불편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라 각오는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생활 속 깊이 뿌리내린 익숙함을 깨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부 기온이 영하권이라 상할만한 음식들은 밖에 보관을 할 수 있었기에 견딜만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을 냉장고 없이 버텼다. 처음의 불편함은 적응기를 거쳐 어느새 익숙함이 찾아왔다. 그것은 장보기는 최소한 필요한 것들만 구입하고, 음식은 작게 만들어 남지 않게 하는 생활의 변화로 가능했다. 구정이 되기 전 미니멀한 집으로 드디어 냉장고가 들어왔다. 덩치를 살짝 줄였지만 냉장고는 오히려 텅텅 빈 것 같은 상황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옆지기는 이때다 싶었는지 달려가 마트를 털어왔다. 다시 냉장고는 배가 불렀다. 덩달아 식구들도 예전으로 돌아갔다. 적응하는데 한 달이 걸렸는데 돌아가는 데는 하루면 족했다.
냉장고를 바꾸고 나니 옆지기는 주문을 한다. 냉장고 상부에 공간이 너무 휑하다느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느니 하면서 옆구리를 찌른다. 이번 설에는 코로나 여파로 집에서 보내기로 했더니 이때다 싶었나 보다. 냉장고 상부에 수납장을 만들고 측면은 조미료 수납장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대충 도면을 그리고 필요한 나무를 계산해서 서둘러 나무를 주문했다. 다행히 설 전에 나무가 도착해서 연휴 동안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상부에 수납장이 들어가야 하기에 하중을 생각해 각재를 뼈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냉장고가 이미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업이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뼈대를 만들어 밀어 넣기로 결정하고 서둘러 작업을 했다. 뼈대를 넣는 작업에만 하루를 소비했다. 보조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오롯이 혼자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더 많이 걸렸던 것이다.
다음 날 외부 마무리를 하는데 이게 또 쉽지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각재가 살짝 휘어 있었기 때문에 계산대로 작업을 하면 수납장 문이 틀어져 높이도 깊이도 맞지 않는 그런 상황에 놓였다. 어쩔 수 없이 조정을 하고 문짝마다 치수를 다르게 재단해서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하루를 꼬박 사용해서 수납장을 완성했다.
마무리를 하고 나서 아우로 126-90으로 마감을 했다. 아우로 126-90은 자작나무의 황변을 방지한다고 해서 주문을 했는데 사실은 살짝 실패였다. 황변 방지를 위해 화이트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았다. 판매 사이트에서 올린 사진만 보고 그냥 주문한 것이 실수였다. 그래도 자작나무의 화이트톤이 그대로 살아나서 나쁘지는 않아 그냥 사용하기로 했다.
전문가의 눈에는 부족하고 흠결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별다른 장비도 없이 이 정도 만들었으면 그만이고, 잘 사용된다면 그게 뭐 그리 큰 대수일까 싶다. 옆지기도 나름 마음에 들어 한다. 양념통들이 깔끔하게 정리되니 가장 좋다고 한다.
연휴가 길다고 생각했는데 짧았다. 고향 대신 쉼을 택했는데, 쉼은 사라지고 노동만 남았다. 옆지기는 보상이라며 자주 방문하는 카페에서 빵을 한 보따리 산다. 커피와 함께...(사실 나는 빵을 잘 안 먹는다. ㅜㅜ)
기분전환도 할 겸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가기로 한다. 아이들은 어차피 코로나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차 안에만 있을 거라며 동행을 거부했다. 결국 둘만의 데이트가 되었다. 바닷가를 드라이브하다가 컵 물회 식당이 있어 두 개를 주문했다. 식당에서 먹고는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닷가를 배경으로 차 안에 앉아 오래간만에 컵 물회를 먹어본다. 한 겨울 얼음 가득한 물회가 목구멍을 조이며 시원함을 외친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컵 물회를 누리면서 지나온 날들을 날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