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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뒤에 숨은 밤, 어둠 속 존재하는 빛

by 소향

불을 끄면 방 안이 조용해진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 공기 중의 먼지가 느껴지고, 전에는 들리지 않던 냉장고의 윙 소리도 뚜렷해진다.
낮에는 바빠서 미처 눈여겨보지 못한 작은 사물들이 불 꺼진 방 안에서 비로소 형태를 갖는다.

나는 오히려, 그런 순간에 삶의 실체를 더 가까이 느낀다.
낮의 언어보다 밤의 침묵이, 빛의 말보다 어둠의 여백이 더 진실하다는 생각을 한다.

살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조용한 밤’에 자리한다.
누가 크게 위로해 주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힘들었던 시절, 밤마다 나를 지나간 생각들은 또렷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말해도 풀리지 않는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던 시간들이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고, 아무도 없던 자리에 결국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돌아보면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밤들이, 나를 만들어 주었다.
거창한 감동도, 드라마 같은 구원도 없이, 그저 매일을 살아낸 조용한 흔적들로 말이다.

사람들은 자주 ‘빛나는 삶’을 꿈꾼다.
무대 위에 오르고, 주목받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으며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나 역시 오래 그런 삶을 좇았고, 빛이 닿는 자리만을 향해 걸어왔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지켜준 것들은 눈부심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낡은 일기장의 문장들, 다 쓴 펜으로 눌러쓴 글자들,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끝내 버리지 못한 편지 한 장, 울다가 조용히 잠든 다음 날 아침의 햇살,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분명히 나를 지나간, 작은 사랑들이다.

이 모든 것은 빛나는 기억이 아니라, 빛 뒤에 숨은 것들이었다.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가 너무 투명해진 듯한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애써도 전해지지 않으며, 매일을 견디지만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 것 같은 날들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런 시간 속에 가장 묵직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보지 않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몇 년 전, 지하철 플랫폼에서 어느 노인을 본 기억이 있다.
누구보다 조용한 모습이었지만, 그 손에 들린 국화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말 한마디 없던 그 풍경은 왁자지껄한 세상의 소음보다 더 깊게 다가왔다.
그 순간 느꼈다.
존재의 무게는 크기나 소리가 아니라, 방향에서 온다는 것이다.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진폭은 달라진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를 향해 기울어진 마음은 이미 빛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어둠을 실패나 결핍처럼 여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명확해지고, 침묵이 있어야 말의 울림이 깊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깊어진 것들이 있다.

그것은, 늦은 밤 식탁 위에 놓인 물 한 잔일 수도 있고, 다 쓰고 버린 편지의 마지막 문장일 수도 있고, 아무도 듣지 못한 채 지나간 누군가의 진심일 수도 있다.
빛 뒤에 숨은 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자리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빛을 기다리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빛처럼 살아가려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보이지 않아 더 오래 남고, 밝지 않아 더 깊게 새겨지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방 안은 불이 꺼져 있다.
창밖 가로등이 커튼 틈으로 희미하게 들어온다.
나는 이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하루를 정확히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내면의 빛을 다시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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