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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Nov 07. 2019

어른을 위한 변명

미성년(2019)

  변명 좀 하려 한다. 어른 답지 못한 어른에 대해 아니 어른 다움에 대해 변명을 좀 하고 싶다. 아마도 나 역시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꼬락서니'라는 단어가 슬며시 올라오는 것으로 봐서 어느새 '꼰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게 확실하다. 아, 정말이지 스스로 나에게 '꼰대'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다. 어느 날 길가던 이십 대 커플의 스스럼없는 애정행각에 "어이 젊은이들 널린 게 호텔이라우"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는 나를 깨닫는 순간, 오 마이 갓. 그렇게 경멸하던 '꼰대'스러움이 내 안에 스멀스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통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그토록 되기 싫었던 어른의 모습을 조금씩 가지게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직 나이가 있는데. 마흔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쩌면 더 늙은 꼰대들이 보기에 나 역시 '요즘 애들' 이겠지만, 부인할 수 없다. 너무도 벅찬 상황 앞에서 외면하거나 혹은 무시하며 무사히 넘기기를 바라는 애매모호한 자세. 비겁한 '꼰대'의 모양새를 말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한술 더 떠 내가 나이를 먹고 보니 '꼰대'들이 점점 이해가 가려고 한다. 딱 내 나이만큼, 내가 쌓아온 시간의 결만큼. 왜 그토록 비겁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소극적이었는지, 당당할 수 없었는지가 내가 먹은 나이의 숫자만큼 그 퍼센티지로 그들에게 관대함이 생겨나고 있다. 좋지 않은 징조다. 도대체 난 왜 그들이 안쓰러운 건지 모르겠다.


  나의 어머니가 나와 대화 중 왠지 밀린다 싶으면 내세우는 것,


"너도 나이 먹어봐라"


와 곧바로 이어지는


"나이 들면 엄마 마음 알 거다"


라는 훈장인 양 들이대는 '나이'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때마다 "꼭 불리하면 나이 이야기하더라" 소리쳤었다. 어른들의 뻔뻔함이 왠지 '나이'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나 우습게도 나도 한 해 두 해, 나이가 드니 그놈의 나이를 들먹이며 이해받으려 했던 어른들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그나마 들먹일 '나이'라도 있으니 그들에겐 위안이다.



영화 '미성년' 스틸컷


  삶이 언제나 마음먹은 로 되지 않는 것처럼 어른들 역시 살다 보니 어쩌다 보니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들이 모두에게 이해받고 설득할 수 있는 상황이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을, 나도 이 나이 먹고 나니 좀 알겠다.


  영화 '미성년' 속 외도를 한 아버지 대원은 문제의 '해결'이라는 단어가 무의미한 그런 상황 속에 놓인다. 그는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게 혼외자를 임신시켜 놓고 종국엔 그 아이가 잘못되어 병원에 입원에 있는 시점에서도 어떠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임이 뻔히 아는 시점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영화 속 두 아이가 되려 어른들이 할 일을 맡아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영화 속에 비치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다 자라지 못한 미성년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중국의 병법서 <삼십륙계> 중 서른여섯 번째 도망치는 병법 배우지 않아도 본능인 것을 말이다. 뭐 다소 폼은 안 나고 참으로 찌질하지만 어쩌겠는가. 얼굴을 못 드는 순간 도망이라도 치면 그나마 인간적이게 라도 보이니 아프고 덜 자란 '꼰대'들의 최후의 수단이 '줄행랑'임을 아프게 난 변명해주고 싶다. 그건 안일해서도 아니고 책임감의 부재도 아니다. 미성숙한 어른들의 미성숙한 생존법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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