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좀 하려 한다. 어른 답지 못한 어른에 대해 아니 어른 다움에 대해 변명을 좀 하고 싶다. 아마도 나 역시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꼬락서니'라는 단어가 슬며시 올라오는 것으로 봐서 어느새 '꼰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게 확실하다. 아, 정말이지 스스로 나에게 '꼰대'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가 없다. 어느 날 길가던 이십 대 커플의 스스럼없는 애정행각에 "어이 젊은이들 널린 게 호텔이라우"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는 나를 깨닫는 순간, 오 마이 갓. 그렇게 경멸하던 '꼰대'스러움이 내 안에 스멀스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통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그토록 되기 싫었던 어른의 모습을 조금씩 가지게 되고 말았다.그래도 아직 나이가 있는데. 마흔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쩌면 더 늙은 꼰대들이 보기에 나 역시 '요즘 애들' 이겠지만, 부인할 수 없다. 너무도 벅찬 상황 앞에서 외면하거나 혹은 무시하며 무사히 넘기기를 바라는 애매모호한 자세. 비겁한 '꼰대'의 모양새를 말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한술 더 떠 내가 나이를 먹고 보니 '꼰대'들이 점점 이해가 가려고 한다. 딱 내 나이만큼, 내가 쌓아온 시간의 결만큼. 왜 그토록 비겁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소극적이었는지, 당당할 수 없었는지가 내가 먹은 나이의 숫자만큼 그 퍼센티지로 그들에게 관대함이 생겨나고 있다. 좋지 않은 징조다. 도대체 난 왜 그들이 안쓰러운 건지 모르겠다.
나의 어머니가 나와 대화 중 왠지 밀린다 싶으면 내세우는 것,
"너도 나이 먹어봐라"
와 곧바로 이어지는
"나이 들면 엄마 마음 알 거다"
라는 훈장인 양 들이대는 '나이'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때마다 "꼭 불리하면 나이 이야기하더라" 소리쳤었다. 어른들의 뻔뻔함이 왠지 '나이'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나 우습게도 나도 한 해 두 해, 나이가 드니 그놈의 나이를 들먹이며 이해받으려 했던 어른들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그나마 들먹일 '나이'라도 있으니 그들에겐 위안이다.
영화 '미성년' 스틸컷
삶이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어른들 역시 살다 보니 어쩌다 보니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들이 모두에게 이해받고 설득할 수 있는 상황이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을, 나도 이 나이 먹고 나니 좀 알겠다.
영화 '미성년' 속 외도를 한 아버지 대원은 문제의 '해결'이라는 단어가 무의미한 그런 상황 속에 놓인다. 그는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게 혼외자를 임신시켜 놓고 종국엔 그 아이가 잘못되어 병원에 입원에 있는 시점에서도 어떠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임이 뻔히 아는 시점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영화 속 두 아이가 되려 어른들이 할 일을 맡아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영화 속에 비치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다 자라지 못한 미성년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중국의 병법서 <삼십륙계> 중 서른여섯 번째 도망치는 병법은 배우지 않아도 본능인 것을 말이다. 뭐 다소 폼은 안 나고 참으로 찌질하지만 어쩌겠는가. 얼굴을 못 드는 순간 도망이라도 치면 그나마 인간적이게 라도 보이니 아프고 덜 자란 '꼰대'들의 최후의 수단이 '줄행랑'임을 아프게 난 변명해주고 싶다. 그건 안일해서도 아니고 책임감의 부재도 아니다. 미성숙한 어른들의 미성숙한 생존법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