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사상가 에리히 프롬이 사랑에 대해 쓴 책이다. 비판이론가의 주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놓고 글을 쓴 데에는 정신분석가로서의 사상적 배경과 더불어 그가 삶으로 체험하고 깨달은 사랑의 본질이 현대사회 비판의 핵심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 책의 독자를 학자가 아닌 대중 일반으로 설정하였는데 형식은 대중서를 따랐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해 아름다운 제목에 낚인 이들이 많이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프롬은 본격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기 앞서 정신분석가답게 인간 정신의 근원적 구조를 해부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가 꺼내든 이야기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신화이다. 아버지에 의한 어머니로부터의 분리와 거세 불안을 그는 신에 의한 에덴으로부터의 추방과 죄책감으로 얘기한다. 한 사람의 발달과정에 개입하는 상상계적 이미지와 상징계적 질서는 신화를 통해 인류와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태초의 결여는 불안 (라캉을 따르자면 욕망)을 낳고, 불안은 카인이 성을 쌓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이 숭배한 우상을 통해, 바벨탑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와,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압제와 폭력의 매커니즘을 통해 세계 속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결여는 에덴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불안은 그 자체로 원죄인 것이다.
에덴이란 무엇인가? 선악이 나누어지기 전 세계이자 사망이 없는 세계, 그리고 신이 함께 존재하던 세계이다. 결여가 죄의 다른 이름이라면, 에덴의 다른 이름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란 에덴으로 존재하는 것, 즉 함께-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랑은 타자를 동일성으로 포섭하는 (그럼으로써 전체주의로 흐르는) 것과는 분명 다른 존재 양태이다. 사랑하기 위해선 반드시 타자로서 존재하는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사랑하기 위해선 내가 주체로서 존재해야만 한다. 이 주체는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바로 볼 수 있는 주체이며 그럼으로써 오롯이 홀로 있을 수 있는 주체이다. 이 지점에서 프롬은 자본주의 분석을 시도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가짜 만족을 약속함으로써 불안을 보지 못하게 하고, 타자의 욕망을 주입함으로써 주체성을 말살시킨다. 현대 사회는 코드화된 취미와 원자화된 개인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스스로로부터 소외시킨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프롬은 사랑이 ‘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라 말한다. 오롯이 홀로 있을 수 있는 주체는 모든 존재자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만족이라는 유효기간이 정해진 공생 혹은 팀웍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이고 , 상태가 아니라 결단이며 약속이다. 그런 점에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계 (원수마저도)를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삶을 이끄는 힘이 되고, 사랑하는 이로부터 사랑 받는 일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내가 사는 세계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잃어버린 어머니의 품에 도달한 것이겠다. 사랑 밖에는 구원이 없다. 정치도 종교도 자연도 그리고 인간 실존도 예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