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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Apr 29. 2022

한글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야~

베이징에서 엄마표 한글 교육

서울에서 잡지 에디터로 일하던 시절, 칼럼에 따라 분야별 전문가를 찾아서 원고 청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원고를 받아본 유학파 전문가 몇몇의 한국어 실력은 그들이 전문 분야에서 쌓아온 자신의 커리어를 담아내기에 한없이 부족했다. 이름값에 걸맞은 유려하고 수준 높은 원고를 기대했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맞춤법과 띄어쓰기의 심각한 오류에 당황했던 기억. 어린 두 딸을 데리고 베이징살이를 시작했을 때 그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무리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 해도 서툰 한국어가 당연한 것은 아니며, 외국어를 네이티브처럼 구사한다고 해도 부족한 모국어의 흠결이 덮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두 아이의 한국어 교육이 엄마인 내게는 가장 큰 숙제로 다가왔다. 당시 큰아이는 네 돌, 둘째는 32개월, 어려도 너무 어린 아이들이라 말도 제대로 못 할 때였는데 주변이 온통 중국어 환경으로 바뀌어 버렸으니 걱정이 정말 많았다.


중국 로컬 유치원을 보내고 1년쯤 지나서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일상생활에도 익숙해질 즈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연년생인 두 딸을 함께 앉혀놓고 한국에서 사 온 한글 교재들을 보면서 자음, 모음부터 하나씩 천천히.

한국에서 나보다 먼저 두 아들을 낳아 기르던 친구는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책을 많이 보게 했더니 특별히 한글을 가르친 적 없는데 스스로 깨우치더라고 조언해줬는데, 당시의 나는 아빠 엄마와 얘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국어에 노출될 기회가 전혀 없는 우리 아이들이 독서만으로 자연스럽게 한글을 깨우치길 기다릴 수 없었다. 아무래도 조바심이 일었다. 중국학교에 입학하면 중국어에 집중하게 될 텐데 그때 가서 두 가지 언어를 한꺼번에 익히는 건 어렵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의 기본적인 읽기 쓰기 말하기를 가르쳤고, 남편이 한국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아이들 수준에 맞는 예쁜 동화책들을 사다 날랐다.


그리고 그때부터 철저하게 집에서는 무조건 한국어만 사용하게 했다. 당시에는 어려서 단어를 잘 모르니까 중국어를 많이 섞어서 얘기했는데, 그때마다 “그건 한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거야” 라고 즉석에서 바로바로 알려주고 다시 말하게 했었다. 집에서 한국어로만 얘기해야 되는 건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예전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큰아이가 유치원 시절 쓴 일기 발견, 내용이 이 글과 안성맞춤이라 더 반가웠다.


아이들이 어설프게나마 한글을 쓸 수 있게 된 후부터는 예쁜 노트를 사주고 일기를 쓰게 했다. 일기라기보다 매일매일 쓰고 싶은 말을 뭐든지 끄적여보길 바란 건데 하루에 단어 몇 개라도, 문장 하나라도 아이들 스스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들을 자신의 노트에 써보게 했다. 처음에는 엄청 서툴고 비뚤비뚤 틀린 글자 투성이었지만 그렇게 쓰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단어와 단어가 붙고, 단어의 조합이 온전한 문장이 되고, 그 문장들이 조금씩 길어졌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책도 생겼다. 

하루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둘째가 옆에 와서 “엄마, 내가 좋아하는 얘기 해줄게” 하더니 책 이야기를 하는 거다. 그런데 듣다 보니까 단어와 문장의 짜임이 그냥 줄거리만 얘기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그 책을 찾아와서 “엄마한테 한 번 더 얘기해줄래?” 하고 봤더니 동화책을 통째 외워서 말하는 거였다.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로 정말 깜짝 놀랐고 또 너무 기뻤다. 물론 아주 짧은 책이었지만 아이 스스로 좋아하는 책을 고르고 외울 정도로 많이 본 거였으니까. 흐뭇했던 마음에 그때 그 책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 후 두 아이 모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그림일기까지는 수월하게 쓰게 했는데 역시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는 일기 쓰기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나 때문일 것이다. 일기를 쓰고 나면 틀린 글자를 다시 고쳐 쓰게 하는 빨간펜 엄마가 옆에서 가만두질 않았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가르치는 방법이 잘못된 거였는데, 나는 틀리게 쓴 쌍시옷의 쓰임이나 겹받침, 띄어쓰기 등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 아무튼 저학년 때까지는 싫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매일 쓰게 했는데 숙제량이 많아지는 고학년이 되어서는 엄마의 강요도 소용없이 방학 때만 쓰게 되었고, 그러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아이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인즉슨 아쉽지만 이제 일기를 안 쓴다는 거다.


그러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한중(韩) 받아쓰기’를 통한 한글 어휘 공부는 중학생이 되어서까지 놓지 않았다. 한자를 외우기 위해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보다 한글을 익히기 위한 목적이 더 커진 ‘한중 받아쓰기’. 말 그대로 같은 뜻의 한자와 한글을 동시에 받아쓰기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중국학교에 입학한 후 중국어 어문(语文) 과목에 관한 한 엄마인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오로지 받아쓰기 밖에 없었는데, 한자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해 한글로 설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의어가 되는 한자와 한글을 짝지어 가르치게 된 것이다. 한자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생소한 한글 단어의 뜻도 국어사전을 찾아 알려주고 내 상식 선에서 일상생활 속에 통용되는 쓰임을 설명한 다음 아이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고 받아쓰기로 테스트. 중국어 단어를 불러주면 한자와 그 뜻에 해당하는 한글을 쓰고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들의 룰이다. 처음에는 간단한 단어 짝짓기 수준이었다가 학년이 높아지면서 중국어와 한국어에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사자성어와 속담, 격언까지 그 범위가 넓어졌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한자에도 점점 더 많은 고급 단어가 등장하고 그 뜻에 해당하는 한글도 덩달아 고급 단어여야 설명이 되니까 일상적인 대화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높은 수준의 한글 어휘를 접하는데 좋은 방법이 되었다. 사실 받아쓰기는 너무 어릴 때 베이징에 건너온 아이들에게 중국어와 한글을 동시에 가르치기 위한 고육지책 같은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두 가지 언어의 어휘력이 동시에 좋아지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다. 뿐만 아니라 영어 단어 테스트를 하면서도 매치되는 한글을 함께 쓰게 했었는데, 나와 두 아이의 이런 받아쓰기 릴레이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시절까지 두 아이의 일기장과 받아쓰기 노트들. 잘 따라주었던 아이들에게 새삼 고맙다.


그리고 한글 교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디어의 힘이다. 공부로 배운 한글이 머릿속에서만 맴돌지 않고 실생활에서 익숙하게 활용될 수 있게 해주고, 최신 유행어는 물론 줄임말이 많은 또래들의 언어습관까지 자연스럽게 가르쳐주는 선생님.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한국의 각종 예능과 드라마, 영화, 웹툰 등의 컨텐츠는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한국어 선생님이자 훌륭한 한국어 교재다. 

특히 흘러가는 출연자들의 대화를 자막으로 고정해서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아이들과 함께 웃고 즐기며 ‘요즘 말’과 맞춤법까지 새겨볼 수 있어서 일부러 찾아서 보여주곤 했다. 이제 중고등학생이 된 두 아이는 모바일 세대답게 다양한 한국의 컨텐츠들을 각자 취향껏 골라 즐기고 있으며, 남편과 나도 적극 권장하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너무 뻔하지만 중요한 독서를 빼놓을 수 없다. 한글 첫걸음인 동화책으로 입문해서 한 해 두 해 성장함에 따라 단계별 독서 계단을 오르는 것은 언어를 넘어서 한국의 사회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야를 자연스럽게 넓혀가는 과정으로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다. 다행히 우리가 살고 있는 베이징 왕징 지역에는 감사하게도 한국 서적을 대여해주는 작은 도서관도 있고 한국 서적을 구매 대행해주는 작은 서점도 있다. 또 한국인 커뮤니티를 통해 중고서적을 저렴하게 구입하거나 운이 좋으면 무료 나눔을 받을 수도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쩌다 서울에 다녀오게 되면 돌아오는 트렁크에 책이 한가득이었던 건 물론이다.

아이들이 중국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학기마다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도 꽤 되는데, 그 중국 책들을 안 읽고 패스하는 걸 눈 감아주는 대신 한국 책을 읽도록 했다. 초등 시절엔 큰아이는 시큰둥하고 둘째가 책을 좋아했었는데, 중학생이 되더니 둘째는 시들해지고 큰아이가 책을 좋아하기 시작해서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한 달에도 여러 권을 읽을 정도로 책 읽기를 즐긴다.

 

함께 한글 공부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고 하니 둘째가 그려주었다. 고마워라~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름의 공부와 관심이 쌓인 덕분에 지금 우리 아이들은 중국어와 한국어 모두 능통하다.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독서나 작문에도 별 문제가 없다. 물론 한글을 쓸 때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가끔 틀리고 요즘 한국 청소년들의 ‘별다줄’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너희들이 중국인 친구들에게 “我是韩国人(나는 한국인이야)” 라고 말하려면 스스로가 창피하지 않은 정도의 평균적인 한국어 실력은 갖추라고.

부모로서 특히 우리 아이들처럼 성장기를 외국에서 보낸 아이들이라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글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모국어는 우리가 어디에 살든 한국인임을 자각하고 흔들리지 않 나무가 되게 해주는 밑거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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