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한글을 뗀 할머니가 종이 위에 삐뚤 하게 그러나 꾹꾹 눌러 이 문장을 쓴다.
"꽃처럼 사람도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한 아이가 할머니에게 말한다.
"돌아올 거예요, 길을 잠깐 잃은 것뿐이에요."(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영화 내용은 다르지만 연결되는 두 대사. 대사가 나온 배경은 유사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할머니(윤여정 분)는 독거노인이고,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할머니(김혜자 분)의 아들은 집을 나갔으며 그 아들 대신 키우던 강아지도 가출했다. 남겨진 또는 버려진, 유기된 사람들.
예전에 한 동생이 내게 물었다. "그 사람이 나만큼 날 아껴주지 않는 걸 알 때, 언니는 어떻게 해?" 동생은 한때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멀어져 속상해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실 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말을 했다.
"그래도 선의를 갖고 잘 대해줘. 상대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거짓말. 이상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 구분 실패. 이걸 위선이라고 하던가. 현실의 나는 '호구'가 되기 싫다. 속도, 크기 무엇이든 내 마음의 것과 차이가 커 내게서 서서히 멀어지거나 아예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상대를 볼 때 나는, 끊어낸다. 우리 사이에 연결돼 있다고 믿어온 관계의 선을. 싹둑. 안녕. 우린 여기까지. 난 호구가 아니거든. 나는 버려진 게 아니라 버린 거야.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돌아올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 길을 잠깐 잃었을 뿐 출발조차 하지 않았거나 도중에 멈춰 섰거나 다른 길로 떠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사람. 그래서인지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그리움과 낭만을 품고서 내게 돌아오길 기대하는 이 없다. 그래서 호구가 되지 않았다. 호의를 마냥 베풀지 않는 사람이 됐다. 쿨해진 만큼 마음은 가라앉는다. 들뜨지 않는 상태는 생활하기 편리하다.
어제 한 선배를 만났다. 같은 부서에 일했던 선배. 나는 일하는 동안 그에게 사적인 감정이 없었다. 가까워질 거라 생각지 않았다. 다른 선배와 더 친했고, 그를 동경했다. 일이 끝날 때쯤 그가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왜 마지막인 것처럼 인사해요? 진짜 밥 사줄 거예요." 그리고 어제가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는 내게 시간을 내주고, 최선을 다해 조언을 해줬으며 함께 있는 내내 나를 배려했다.
내가 동생에게 했던 말, 상대의 마음과 상관없이 내 마음을 믿고 상대에게 잘해준다는 말. 그는 실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게 됐을 때 나는 들떴다. 이런 사람을 만나서, 내게 선의를 갖고서 온 마음을 다해주는 사람을. 들뜬 마음에 약속을 파하고 돌아온 뒤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일과는 망쳤지만 자꾸 얼굴에 미소가 띄워졌다. 들뜬 내가 나도 좋았다. 유용하진 않지만 벅찼기 때문에. 길을 찾았다.
상대가 길을 잃었을 때, 제자리에 서서 기다릴 수도 있지만 먼저 손을 흔들 수도 있다. 내게 오는 길을 얼른 찾아 돌아올 수 있게. 선배는 후자였다. 호구가 될 수도, 남겨지거나 버려질 수도 있었지만 먼저 믿음을 보여줬다. 덕분에 난 믿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었음에도 꽃처럼 그에게 돌아갔다. 나도 선배처럼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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