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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Jan 12. 2020

17. '고생했다.'

그 시절 부모에게 필요했던 말일지도. 깨달았을 때 좀 더 어른이 됐다.

아빠는 슈퍼마켓 배달원이었다. 여름에는 수박이, 겨울에는 쌀이 제일 배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고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한 층에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가 걸리면 무거움은 배가 됐다. 아빠가 낑낑 대며 물건을 들고 뛰어가면 집 안까지 넣고 가 달라는 손님도 있었단다.


다마스라 불리는 소형 트럭에 짐을 싣고, 한 손엔 배달 영수증을 다른 한 손엔 핸들을 잡고서 운전하던 40대의 아빠. 나는 가끔 엄마와 함께 아빠를 돕기도 했다. 주로 명절이었다. 배달 물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을 쳐내야 우리도 명절을 쇨 수 있었으므로 엄마와 나까지 동원된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엘리베이터를 잡는 일이었다. 아빠가 좁고 복잡한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댄 후 물건을 꺼내는 사이 동으로 얼른 뛰어가 엘리베이터를 잡아두는 것이다. 엄마가 대신 배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짐을 싣는 사이 슈퍼마켓 뒤편 골목에서 서서 엄마와 먹던 떡볶이, 가끔 여유가 있을 때면 짐 대신 날 실어 달려주던 아빠의 수레. 이것들을 떠올리면 내게 그때의 기억은 놀이와 같았다. 돈 없는 젊은 부부에게 당시는 너무나 고된 날들이었겠지만.


어느 연도 어떤 명절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내 기억에 아빠는 내가 초등학생이던 6년 내내 배달원이었다. 그리고 매 명절은 바빴다. 나는 자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때론 애교로 종도 대신 눌러봤다. 그 날들 중 하루가 끝난 후에 아빤 내게 봉투를 줬다.


'수고했다, '고 적힌 흰 봉투. 5만 원이 들어있었다. 일당이었던 셈이었다. 초등학생이던 내게 그 돈은 컸다. 그러나, 아빠에게서 그 봉투를 받았다는 의미가 더 컸다.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내가 도움이 되는 존재라고. 그것도 내 부모에게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에게서.


그 봉투를 항상 지갑 맨 앞에 끼워 넣고 다녔다. 그것은 당시 놀이 같던 나날들과 인정받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덥고 추운 날 뛰어다니며 일하던 젊은 시절의 부모를 더욱 상기시켰다. 그들이 그토록 최선을 다했던 이유에 오빠와 나에 대한 책임감이 컸단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와 다섯 살 터울의 오빠는 한때 엇나갔다. 엄마는 자주 학교로 불려 나갔다. 저녁 식사 자리엔 오빠의 날 선 반항이 가득 차 나는 곧잘 체했다. 아빠는 급기야 오빠에게 손찌검도 했다. 학교 근처 치킨집에서 오빠가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 걸렸을 때였다.


어느 날, 우리 둘 다 20대가 됐을 때 오빠가 말했다. "아빠가 한참 어린 GS 본사 직원한테 고개 숙이더라. 그리곤 차에서 에어컨도 켜고 쉬는 걸 보는데 정신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치킨집 대신 아르바이트할 겸 아빠를 도울 때였다고 했다.


그때 '수고했다'는 말이 정말 필요했고, 듣고 싶었던 사람은 아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며 부족한 생활비로 가정을 꾸려가야 했던 엄마도. 그때 돈 봉투는 아니라도 힘이 될 편지 한 통 쓸 줄 아는 딸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기도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부모가 한 인간으로서 보이는 때라고 생각해왔다. 부모에게도 위안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순간에 난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이제 내가 부모에게 돈 봉투를 줘야 할 때다. 그 봉투에 '수고했어요.'란 진심을 담아.  


# 놀러와요, 글-놀이터!

https://room-alo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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