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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Jan 27. 2020

31. 언어적 콘돔이 가둔 말들

방어적 말하기

"다행이네."

설날에 아빠께 오늘 옷이 멋지다고 했더니 돌아온 대답. 난 조금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색한 문답이지 않나. 무엇이 다행이란 걸까. "패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서 네 눈을 온전히 지켜주고, '너희 아빠 옷이 왜 저렇니?'란 말을 안 듣게 해 줘서 다행이네."란 건가? 칭찬에 과시도, 부정도 아닌 이 방어적인 표현이 연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사소한 사례지만 은퇴 이후 취약해진 아빠의 말이라 더 그랬다.

사실, 나도 "다행이야"란 말을 습관적으로 쓴다. 내가 준 도움에 선배나 친구가 칭찬과 감사를 표할 때다. "내가 잘하긴 하지" 같은 과시도, "아니야, 그게 뭐라고"처럼 부정도 아닌 애매한 위치의 말, 다행이야. 이 말엔 내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진 않아서, 란 말이 생략됐다. '자기 방어력 만렙'이란 평가를 들어본 나 스스로 생각해도 참 수세적인 표현이었다. 내가 말해놓고선 참 소심한 대답이네,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영화 '메기스 플랜'에서 남자 주인공 존은 "~같다는 말은 언어적 콘돔이다"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같다'는 표현도 방어적이다. 콘돔은 피 임기구지 않나. 성관계 욕구는 있으나 임신은 원치 않을 때 사람들은 콘돔을 쓴다. '같다'는 말도 의사나 감정 표현은 하고 싶지만 단언하지 못하는 발화자의 심리가 담겨있다. 같다, 가 ~다, 에 비해 훨씬 작은 크기의 용기를 요한다. 다행이네, 란 말도 마찬가지다.

'다행이다', '같다'란 언어적 콘돔이 가둔 말들. 목구멍으로 삼켜버렸거나 아직 마음속 깊은 곳에서 꺼내어지지도 못한 솔직한 표현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몸속 어딘가에 쌓여있을 그 말들은, 마음들은 점차 무게가 더해갈수록 속이 답답해질 텐데. 시간이 지나면 독이 돼버릴지도 모르는데. 일회용 콘돔을 버리듯 갇힌 말들도 한 번씩은 다 버려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싶다.     


# 놀러와요, 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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