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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an 21. 2024

<맡겨진 소녀>의 말없음에 대해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읽으며

마지막 장 앞에서 숨이 멎었다. 어떻게 형용이 안 되는, 극강의 적요, 활시위를 당기기 일보 직전의 팽팽함. 이전에 만나본 적 없는 오묘함을 느꼈다. 이게 뭘까? 읽는 이에게 한 컷 한 컷 그려가며 빨려들듯 집중하게 하는 문장. 소설가 김금희가 추천사에서 '이 소설을 설명할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가 잡힌다.      

    



영화 <벌새>의 감독 김보라가 "고요하지만 뜨겁게 끓어오르는 문장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말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감정을 자아낸다."라 극찬한 것이 허언이 아님이 촉각으로 느껴지는 듯 생생했다. 이토록 간결하면서 정밀하고, 담담하면서 뜨겁다. 첫 전개부분에서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기대감을 자아냈다.



맙소사. 문장 하나하나 어찌 이리 살아있는지, 내가 마치 로드 무비 속 주인공이 된 양, 한 순간도 쉬이 지나칠 수 없었다. 달리는 아일랜드의 시골길의 묘사가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에 대한 숱한 암시와 복선을 예고하고 있어서 무슨 스릴러 호러 영화라도 찍으려는 심사일까 싶을 정도이다. 무심한 배경에 인간의 섬세한 감정선을 깔아놓는 전개.



영화적 요소가 저절로 연상되었는데 2022년에 <말없는 소녀>라는 영화로 탄생되었다. 영화 전반의 주제어랄 수 있는 '말없음:침묵"이 제목이 될 이유가 된다. <데미안>의 두 세계가 '맡겨진 소녀'에게 '삶과 죽음','생존과 실존','사랑과 상실'의 형태로 펼쳐졌다. 상처가 화인으로 남은 자, 삶 자체가 상처인 자, 상처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자','상처 가진 이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흐느낀다 아니 받아들인다.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것 없어도 돼." - 27쪽

"모든 것은 또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예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된다." - 33쪽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 17쪽



삶이 아프다는 것을 10살의 나는 돌연 깨달았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았지만 저절로 알았다. 그 곳의 분위기, 사람들의 표정,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무거움 등등. 소설 속 이 세 문장을 온몸으로 느낀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과연 그랬다. 비밀을 알게 된 것으로도 나는 부끄러운 자의 영역에 속하는 듯했다. 이젠 이전의 순진하고 무조건 해맑게 웃던 내가 될 수 없었다. 평소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떤 나여야 하는지......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절대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73쪽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28쪽



말없음표가 얼마나 유용한지 나는 체득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할지를 잠시 생각하다보면 이미 말할 타이밍을 놓친다. 사람들은 상대를 배려할 만한 인내심이 없기에 어느새 화제가 옮겨가 있어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습관이 되면 군중 속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유용할 때가 많다는 것을 저절로 배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아들을 앞세운 일이 죄가 되어 평생 형벌을 지고 있는 킨셀라 아저씨 내외. 세상은 암묵적 손가락질로 그들의 행위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비난한다. 그래도 부부는 세상을 향한 원망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받아들인다. 친척 딸아이를 여름 방학 한 시절 데리고 있으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다정이 무엇인지, 아픔을 견디는 일에 대해 몸으로 보여준다.



모순적이고 거친 부모의 슬하에서 정반대의 세상을 사는 킨셀라 부부를 통해 존재론적 존중을 맛본 소녀. 달콤하고 신비로운 비현실적 세계에 더 머물고 싶으면서도, 거칠지만 익숙한 자신의 세계로 회귀하고 싶다. 자신을 정성으로 돌봐준 킨셀라 아저씨 내외의 상실을 어린 소녀가 깊이 애도하며 위안이 되는 장면은 인간애의 숭고함이 느껴진다.



"우리는 계속 걷다가 절벽과 암벽이 튀어나와 바다와 만나는 곳에 도착한다. 이제 앞으로 갈 수 없으니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은 돌아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73쪽



꿈같던 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맞닦드린 현실 앞에서 소녀는 다소 절망한다. 그러나 소녀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아빠가 보이는 후안무치의 행동도 비난하지 않고, 자신이 일시적으로 얼마나 행복하고 따듯한 시간을 보냈는지 드러내지 않는다. 소녀는 이미 킨셀라 부부의 삶을 통해 상대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정한 아픔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게 된 듯하다.



소설가 최은영은 '다정함이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아픔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보았다고 했다.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그래서 소녀는 그 갸녀린 시선을 마치 메타뷰를 장착한 듯, 전체를 조망하며 부모를, 킨셀라 아저씨 부부를, 불안한 존재 모두를 침묵한 채, 그저 바라만 보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 말해지지 못하는 것들, 말없는 소녀로 살 것을 결심하게 도는 맡겨진 소녀의 이야기가 많이 아리다.       




작가 클레어 키건에게 쏟아진 평단의 찬사가 과장이 아님을, 103쪽에 이르는 단편에 가까운 중편이 준 여운과 깊이가 한참 서성이게 한다. 내일부터 다시 차가워진단다. 살을 에는 듯한 아픔이 가슴 한자락을 베고 스친다. 조숙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날의 내가 창백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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