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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Feb 19. 2024

결핍 VS 풍요

선택의 언어

중고등학교때 책을 제법 읽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모르는 단어들을 채집했다가 멋있는 척하고 싶을 때 슬쩍 끼워넣으면 '우와'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제법 '있어 보이는' 단어로 '멜랑꼬리'와 '노스탤지어'가 있었다. '멜랑꼬리'는 원래는 그 어원을 찾아가면 그리스 히포크라테스에까지 이른다. 그는 인간을 4가지 체액으로 분류했다, 인간의 기원이 불과 바람,물과 흙이 빚어내는 것에 따라 다혈질, 점액질, 담즙질, 우울질로 불렀다. 멜랑꼴리인 우울질은 체액의 불균형에서 오는 몸의 고통을 지칭했다. 그러나 고대의 철학자들은 종종 슬픔에 잠기다가 오래도록 슬픔의 감정을 지속하게 되었다. 


중세시대 지배적 종교인 기독교의 관점에서야 멜랑꼬리는 쉬이 용서가 되지 않는 무엇이었다. 신을 만났다면 그런 깊은 우울이나 슬픔이 찾아들 일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멜랑꼬리한 상태로 무기력을 호소할 때는 영성의 도전이자 시련기라 믿었다. 그래서 중세에는 멜랑꼬리는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인간은 누구라도 일정 부분의 우울인자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내가 청소년기 문학 책을 읽으며 만난 '멜랑꼬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제법 멋있는 단어가 되었다. 음악가, 화가나 건축가 등 예술가들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영감 가득한 눈빛으로 뭔가에 들떠 있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멜랑꼬리'를 전유물로 여겼다.


18세기에 들어서며 독일의 학자들이 형이상학적 관념론에 빠져들더니, 예술가들은 한술 더 떠서 이상주의의 내면화 과정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에 골몰했다. 스스로 도취되기 시작한 예술가들은 예술이라는 고귀한 가치에 헌신한다는 자부심으로 현실과의 고리를 끊어내는 지경에 이른다. 독일에서의 멜랑꼬리는 예술가적 천재론을 업은 분위기를 타고 더더욱 고통지수를 높여갔다. 고통이 예술가의 훈장쯤으로 여기며 창작의 고통을 즐기고, 스스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천형을 지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로써 자폐적 성향이라고까지 명명하는 독일식의 학문 언어, 예술 언어 등 지독히 어려운 독일적 학문과 예술이 탄생한다.


멜랑꼬리의 단어 역사성을 보다가, 내가 '우울'을 대한 태도들이 떠올랐다. 정말 철없던 중고등시절에는 멜랑꼬리해보이고 싶었다. 세상 고독을 다 짊어진 듯한 표정을 짓고 그런 말을 골라서 하기도 했다. 외로웠던 거 아닐까? 입버릇처럼 '내겐 우울인자가 있다'고 합리화시키며 달라보이려 했다. 말하는 만큼 더 우울해져갔으며, 정말 삶이 시리다고 느껴졌다. 고3병을 심하게 앓았다. 대학을 가야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덧없고 덧없어서 애꿎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엄마를 미워했다. 날 낳지 말지......명랑 쾌활하던 소녀가 진짜 독일식의 멜랑꼬리에 빠져 삶이 괴로웠다. 눈이 떠지는 아침이 저주스러웠다.


나는 이렇게 태어나지 말아야 했었고, 이런 꼴로 생겨나지 말아야 했고, 이렇게 못나서도 안되었고, 이렇게 대책없어서도 안되었다. 일체의 나를 부정했다. 개똥철학으로 다져온 아성이 한번에 무너져 내려앉았다. 나는 진정으로 멜랑꼬리했었다. '죽고 싶다'고 중얼대다가, '나 좀 가만히 두라, 죽어버리기 전에'라고 소리쳤다.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고, 그런 자신이 너무 싫었다. 심리적 내홍을 겪느라 공부는 더욱 뒷전이었고, 줄창 음악감상실에 틀어박혀 음악만 들어댔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왔지만 이젠 '멜랑꼬리'라는 말이 무서워졌다. 그래서 다시는 입밖에 내어놓지 않았다. 


코칭을 하러 오는 고객들의 모습에서 한때의 내 모습을 닮은 이들을 만난다. 그의 언어는 확실히 한정적이고 부정적이며 두려움에 차 있다. '~~할까봐 겁나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잘못 되면 어떡하지요?", "그건 너무 어려워요.", "지킬 수 없을 거 같아요.", "원래 그래요.", "저는 안돼요." 등등 끝없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안되는 이유를 어찌나 잘 찾아내는지. 조건화된 생각, 제한적 신념, 호된 경험에서 얻은 정서가 한번에 줄을 서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의 감정마저 왜곡시키곤 한다. 그런 불안을 쏟아낼 때는 나는 그저 가만히 함께 한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개입할 수 있을까?


안되는 것, 모자라는 것, 자신 없는 것, 소유하지 못한 것 등 결핍의 마인드에 머물면 가속도가 붙어 헤어나오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코치와 함께 하면 자신의 모드가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혼자서 늪에서 허우적댈 때는 아무런 책임감도 없어 제어장치가 고장난다. 그런데 코치가 아무 판단없이, 섣불리 개입도 않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달라진다. 침묵을 지키다가 "지금 말하면서 어떤 것을 느꼈나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정말 원하는 것은 뭔가요?"등의 질문 하나만 해도 고객은 자기 위치성을 찾는다. 충분히 수용되어진 마음이 합리적인 생각을 시작한다. 뭔가 또렷해지고 구체화되면서 '알아차림'이 일어난다.


"무엇을 알아차리셨나요?"라고 물으면, 자신이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자신은 이전의 경험에서 온 좌절감을 불러와서 두려워하고 있단다. 그 두려움이 다시 앞으로의 시간에 대해 불안을 키우고 있다고. 성공했거나 만족했던 순간을 떠올리기보다 결핍의 순간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결핍적 존재로 여겼다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정말 이런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고. "왜 저는 애당초 결핍 마인드를 선택하고 결과만을 잘 되기를 바랄까요?", "왜 저는 늘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억울할까요?", "왜 감사의 마음을 채우지 못하죠?"라며 자책한다.


방백이다. 고객이 무안하지 않도록 때로는 들은 척도 않고 있어야 한다. 스토리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그래서 고객은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알아차렸는지 되비추며 확인하기. 내면 깊숙히에서 끄집어져 나온 말들이라 아프기도 하겠으나 제대로 익은 언어는 그렇게 탄생된다. 고객의 변화와 성장에 관심과 호기심을. 결핍으로 가득했던 시린 가슴이 녹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나의 숱한 경험이 잘 말해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 풍요 버튼을 누르기 시작하면 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선택이 달라지면 내 환경은 물론 내 행동이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풍요를 선택하면 하다못해 욕심을 비워낸 텅 빈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결핍을 선택하고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도 배움은 일어나지만, 풍요를 선택하면 바로 웃으며 배울 수 있다. 선택이란 의식을 보내 초점화를 하는 것이다. 잘못된 선택으로 일을 망치게 될 때를 복기하면 대부분 나는 시작부터 지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손자병법>에서 강조하듯, 내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상대를 모를 수밖에 없다. 두려움과 불안 가득한 결핍 마인드에서 어떤 에너지를 끌어올 수 있을까? 그래서 자신이 부족하고 늘 채워야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내 마음안에는 엄마처럼 따듯하게 무엇이든 채워줄 수 있는 내면 엄마도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뒷배가 든든한 나는 이미 부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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