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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Mar 04. 2024

보이지 않는 것 VS 보이는 것

코치의 언어 : 상상의 언어

아프리카의 나미비아 함바족은 초록과 파랑을 구별하지 못한다. 색채 구별 실험 결과 여러 개의 초록색 사각형 사이에 끼어있는 파란색 사각형을 인식하지 못했다. 같은 초록이나 색깔의 톤을 달리한 사각형은 바로 구별해냈다. 반면에 서양인들 중에는 그 밝은 초록색을 찾아내지 못했다. 초록과 파랑을 구별하지 않는 문화권도 있음이 밝혀졌고 또 다른 인식이 생겨났다. "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다면 색 자체를 아예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이 후속 연구를 통해 '색을 구별하는 능력은 보편적이지만, 발달 과정에서 색을 지칭하는 언어를 익히고 활용하면서 색 구별의 문화적 차이가 나타난다.'는 점을 밝혔다. 인지과정에서 언어가 미치는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신호등의 녹색을 우리는 '파란 불'이라고 통상적으로 말한다.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녹색을 청색으로 불러온 습성을 그대로 적용해서 적색, 황색, 청색이라 바꿔 부른다. 그러고 보면 분명히 초록색인데 '잎 푸른 채소', '파란 들판'이라고 어떤 의문도 안 달고 표현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청색과 녹색을 전부 다 푸른 색이라 표현하는 데는 녹색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이 없어서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녹색을 우리말 식으로 표현해보자 해도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풀색'이라고 하자니 녹색 뿐 아니라 브라운 계열의 풀도 많아서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 보리가 자라날 때의 청보리색이라고 지칭하고자 해도 이미 우리 되는 '청보리'라는 단어를 기억하고 있다. 여기에도 이미 청색이 점령을 해버렸다.



위의 이야기들은 김정운의 <창조적 시선>에서 언급하는 이야기들에 내가 덧대었다. 녹색이 자연을 상징하는 색으로 등극한 게 19세기 말의 일이라고 하는데 온갖 의문이 든다. 우리나라는 지천에 산이 둘러쳐져 있고, 논밭이 그토록 넓게 펼쳐져 있었음에도 녹색의 구분이 안 될 수 있었을까? 결국  철저히 파고들어 개념화하는 체계가 없었던 건 아닐까? 색 구별을 정밀히 하며 즐길 만한 심미안을 갖출 수 없었음일까? 지천에 널린 자연의 색이라 배경색처럼 여긴 것일까? 누구도 그 구별을 하려 시도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먹고 사는 게 중요했던 서민들은 그렇다 쳐도, 개념화가 안 된 걸 보면 윗분들이 선호한 색이 아닐 수도. 혹은 색을 다루는 이들이 뽑아내기 어려운 색감이었을 수 있고, 민족적 취향에서 밀려난 색일 수 있겠다.



버젓이 눈에 보이는 데도 구별할 필요도 안 느끼니 언어가 있을 필요가 없었을 터. 그런데 언어화 되지 못한 배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염두에 두지 않은 대상이었던 거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했는데 인식 체계 안에서 존재감이 아예 없었다. 이처럼 보이는 것도 의식을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림자 취급 당하기 십상인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은 말해 뭐하랴? 생각만으로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을 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개념화하고 보이는 것으로 실제 구현해내는 이들은 어떤 일이든 성공하기가 쉽다. 주변에 디자이너들이 몇 있는데 그들은 뭔가를 보고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화 중에도 수시로 머리속에서 도면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상상의 공간에서 맘껏 구사해서 현물화해낸다.



그들은 뇌의 상상창고에 자신의 기억을 생생하게 박제해두었으니 구체화시키기 위한 다음 행보가 쉬워진다. 이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막연하여서 생각이 더 나아기기 어렵다. 그림이 그려지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생기가 돌고 뭔가를 자꾸 해보고 싶어진다. 코칭 장면에서 고객의 지금미래의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이전의 성공 경험을 불러와서 자원화한다. 실패 경험이나 부정적 정서마저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해석되고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를 자원화할 수 있다. 혹은 원하는 일과 관련해서 5년 후, 10년 후, 혹은 그 목표를 이룬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그려보기를 한다. 지금미래에 대한 꿈꾸기를 지금 그 자리에서 해본다. 설정한 목표를 이룬 성공적 모습을 그리면  대부분 살짝 흥분한 채, 말하기 전과 완전히 다른 모드로 전환된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갔을까?' 네루다의 질문은 많은 이들에게 어린 날의 꿈을 되돌려주고 순수를 회복하게 만들었다.  궁금한 게 없어지면 살 이유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펼쳐가고 싶은 방향을 잃어버렸는데 꿈꾸기가 가능하겠는가? 코치는 고객과 함께 하며 고객 개개인의 정체성을 밝힌다. '나였던 그 아이'를 불러내어 그 아이의 꿈을 듣고 무엇이 가능했는지, 불가능했다면 지금 어떻게 해석되는지 무엇을 알아차렸는지 묻고 또 묻는다. 그 아이가 용기를 낸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싶어지고 그려갈 미래의 시간에 대해 맘껏 꿈꾸게 한다. "아무런 제약이 없다면 무엇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상상하는 것만으로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오른다.



사람은 향진성을 가진 존재다. 자극이 필요할 뿐, 본능적으로 더 나은 시간, 더 나은 세계를 살기 위해 지향점을 상향 조정한다. "상상력은 창조의 시작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상상하고, 당신이 상상한 것을 원하고, 마침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조지 버나드 쇼는 말했다. 과연 그랬다. 상상력으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꿈꾸고 나면 고객들은 감각으로 체화한 그 기쁨을 구현시키고 싶어서 아이디어를 쏟아낸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면서 딱딱한 뇌가 유연해진다. 상상력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어디든 날아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마저 채워준다.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을 찾아내며 신기해하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항할 용기를 장착하고 , '나였던 그 아이'가 되어 세상에 호기심을 품는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럼, 여전히 꿈을 꾼다. 한없는 상상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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